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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리에 각인되지 않는 광고카피는 죽은 활자에 불과하다. 

몇 마디 말에 펄펄 살아 뛰는 생명력을 담아야 하고, 

틀을 깨는 한마디로 통쾌한 한 방을 날리거나

숨겨진 마음을 절묘하게 들춰내 짙은 여운을 남겨야 산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언어 중에 광고 카피만큼 강력한 게 없다. 



산업광고는 상품의 특성이라는 기본컨셉이 있으니 그나마 낫다. 

무작위 대중을 상대로 사람을 브랜드화하고 

짧은 언어 속에 누군가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마법’을 걸어야 하는 정치광고는 

광고 카피 중에서도 최고 난이도에 속한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내걸었던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은 

개인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는 정치광고 카피 중 하나다.

물론 정당이나 인물에 대한 선호도와는 별개의 점수매김이다.



비슷한 카피로 두산그룹이 사용한 ‘사람이 미래다’가 있다. 

2007년 대선에 출마했던 문국현 후보의 ‘사람이 희망이다’도 유사하다. 

그러나 “사람이 먼저다”가 주는 임팩트를 따라가기에는 2% 부족한 게 사실이다.



사람이 먼저다. 

특별할 게 없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보다 체면이, 돈이, 권력이, 이념이, 학력이, 지위가 앞서는 세상에서 외친 

“사람이 먼저다”는 오염된 공동체에 산소같은 신선함을 줬다. 

이 카피는 아직까지도 진한 여운을 남긴다.



사람이 먼저인 공동체는 사람의 격(格)이 존중되는 사회다. 

사람이 먼저인 사회는 적어도 

다른 사람의 인격을 먹이사슬의 포식자처럼 함부로 희생양삼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위해 볼 썽 사나운 이전투구를 일삼지 않는다.



우리 사는 세상에 사람의 격이라는 가치가 건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는 차치하고라도, 

지금 달라스 한인사회는 사람의 격이 존중되는 사회일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답은 부정적이다. 

금 달라스 한인사회엔 사람의 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4일(월) 한인타운의 한 식당에서는 희안한 기자회견이 벌어졌다. 

수년전 카지노에서 진 빚을 아직까지 갚지 않는다며 

달라스 한인사회 인사를 고발, 성토하는 자리였다.

피해자를 자처한 제보자는 자신이 노름돈을 꿔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년간 자신이 카지노에 출입했음을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읊조렸다.

 

문득, 수년 전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울분을 참지 못한 채 신문사를 찾아왔던 어떤 제보자가 떠올랐다. 

‘성공을 장담한다’는 말에 속아 수십만달러를 투자했다가 돈을 떼였다고 했다. 

자신 말고도 피해자가 두어명이 더 있다고도 했다. 

피해액이 더 많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사기를 친 사람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언성을 높이던 그가 

갑자기 목소리 톤을 낮춘 건 

‘투자한 비즈니스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다.

“이건 기사에 나가면 안되는데…”라며 말끝을 흐린 그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성매매 업소”라고 얘기했다.



전혀 다른 사람, 전혀 연관없는 별개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두 건의 제보가 자연스레 오버랩된 건 

도긴개긴, 가해자나 피해자나,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당한 손해만 중요하지, 

제3자적 시각에서 바라본 

사회적 기준이나 윤리 따위는 관심없는 

피해자의 사고 또한 판박이다.



‘적대감’이 넘쳐나는 우리사회에

‘사람이 먼저다’는 슬로건은 여전히 숙제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어서라도 남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어하고, 

타인을 조롱하는데 급급해 자신에게 돌아올 손가락질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아둔함이 안타깝다.



[뉴스넷] 최윤주 편집국장 editor@newsnet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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