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혁명100주년’ 미국내 독립운동 성지를 찾아서(3)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 기획취재 시리즈>

 

 

Newsroh=로창현기자 newsro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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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8월 4일. 두명의 동양 신사가 초록이 무성한 뉴욕 롱아일랜드의 숲길에 접어들었다. 윤병구와 이승만. 두 사람의 표정은 삼복 더위를 느낄 수 없을만큼 비장했다. 풍전등화에 처한 대한제국의 주권을 되살려야 한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온 길이었기때문이리라.

 

뉴욕 맨해탄 섬 오른편에 위치한 롱아일랜드는 오래전부터 상류층의 별장지대로 인기가 있었다. 특히 북쪽의 오이스터 베이 새거모어 힐(Sagamore Hill)엔 특별한 곳이 있었다.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별장인 ‘여름 백악관(The Summer White Hous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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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엔 우리 선조의 독립운동 사적지가 여러 곳 있지만 미국 대통령의 여름 별장이 대한제국의 막후 외교활동이 전개되는 등 최초의 한인독립운동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114년전 여름 두 사람은 왜 이곳을 찾아왔을까.

 

외세의 침탈로 소용돌이에 빠진 대한제국은 20세기에 접어들어 청일전쟁, 로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이 동북아의 패권국으로 등장하면서 植民(식민)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고종 황제는 미국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미국은 서양 열강 중 조선이 가장 먼저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였다. 1882년 5월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1조의 내용만 본다면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탈하는 것은 미국과 전쟁불사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선과 미국은 제3국으로부터 불공경모(不公輕侮 공정치 못하게 홀대 내지는 모욕)를 당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상대국에 알려 반드시 서로 도와서 선처함으로써 상호우의 관계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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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미국은 다른 주변 강대국과 달리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고 비교적 초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고종이 미국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는 사실은 고종의 손녀인 이혜경여사(뉴욕 거주)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친왕 부인)가 고종황제께서 ‘미국이 꼭 도와줄거야. 꼭 약속을 지킬거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해요.”

 

대한제국을 집어 삼키려는 일제의 노골적인 魔手(마수)는 시시각각 조여들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러시아 발틱함대를 제압하는 등 초기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전면전으로 치달으면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식민지 필리핀을 기반으로 아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던 미국은 1905년 7월 초 루즈벨트 대통령이 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한 끝에 8월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하와이 한인사회는 러일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한인들의 권익옹호에 힘쓰던 윤병구에게 그 임무를 맡기게 됐다. 마침 미국 국방장관 윌리암 태프트가 7월 7일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와 함께 일본으로 가는 길에 호놀룰루에 들르자 윤병구는 하와이 총독대리 앳킨슨의 도움으로 한인대표의 자격으로 그를 찾아가 미국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았다.

 

한인들은 7월 12일 ‘하와이 거주 한인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Petition from the Koreans of Hawaii to President Roosevelt)’를 작성했다. 청원서 내용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러일강화회의 때 한국의 주권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7월 15일 하와이의 한인들은 에와 사탕수수농장에서 임시공동회를 열어 하와이 한인 7,000명을 대표한 공식 대표로 윤병구를 선출, 전권을 위임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윤병구의 여행 경비를 위해 500달러(현 시가 1만달러)를 모금할만큼 뜨거운 조국애를 보였다. 윤병구의 활동은 러일강화회의의 참관인으로 활동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진짜 목적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미리 만나 한인들의 희망이 담긴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윤병구는 당시 조지워싱턴 대학교 입학을 위해 워싱턴에 와 있던 이승만에게 전문을 보내 거사 동참을 제안했고 7월 19일 알라메다호를 타고 미 동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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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승만은 독립협회 소속으로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1904년 11월 도미했다. 외형적으로는 유학이었으나 실상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미국의 친한파 의원인 딘스모어(Huge A. Dinsmore)를 통해 미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해 조미수호조약을 근거로 미국의 주권보장을 요청했다.

 

윤병구와 이승만은 7월 31일 워싱턴DC에서 조우한 후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을 찾아갔다. 청원서의 문장을 다듬고 거사진행을 상의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8월 4일 뉴욕주 오이스터 베이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여름 별장을 찾아간 것이다.

 

한달여의 치밀한 전략 끝에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난 이승만과 윤병구에게 割愛(할애)된 시간은 단 30분이었다. 두 사람은 짧은 접견 동안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들고간 청원서와 자개로 된 접시 1점을 선물로 증정했다. 루즈벨트는 청원서의 내용을 읽어본 후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관을 통해 국무성에 제출해 달라면서 이 청원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겉모양은 공식 절차를 밟아서 전해달라는 것이었지만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제약된 대한제국의 처지를 생각하면 매몰찬 거절이나 진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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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오기전에, 미국은 소위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 루즈벨트는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佳太郞)와의 회담에서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묵인하는 대신 한국을 보호국화 하려는 일본의 행동에 미국이 동의한다’는 밀약을 추인하는 전보를 7월 31일 자로 동경에 보냈다. 23년전 조미간 맺은 조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이미 ‘짜고치는 고스톱’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윤병구와 이승만은 루즈벨트 앞에서 대한제국의 주권 독립을 절절하게 호소하면서 값비싼 자기 접시까지 선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태프트의 소개장부터 루즈벨트의 접견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과 대한제국을 欺瞞(기만)하는 희대의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윤병구와 이승만은 루즈벨트의 권유대로 청원서를 워싱턴의 주미대리공사 김윤정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일본의 꼭두각시가 된 김윤정이 수령을 거부함에 따라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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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역사의 아픔이 담긴 새거모어 힐을 방문한 것은 공교롭게 윤병구와 이승만이 루즈벨트를 찾아간 날짜와 거의 같았다. 오이스터 베이의 바다가 보이는 낮은 언덕배기에 위치한 ‘여름 백악관’은 83에이커의 넓은 부지에 붉은 돌로 기초를 이룬 대저택으로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고 있다.

 

주차장을 지나 작은 부속 전시관을 지나면 오솔길을 따라 간다. 현관엔 가지 대부분이 잘린 큰 나무가 있고 서쪽으로 넓은 베란다에 석양을 감상하도록 의자들이 놓여 있다.

 

새거모어 힐은 루즈벨트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집기를 비롯하여 각종 자료를 모아놓은 역사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승만과 윤병구가 선물했던 자기 접시 또한 거실 벽면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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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출신인 루즈벨트는 대통령 임기를 포함, 사망한 1919년까지 34년을 이곳에서 여름을 보냈다. 루즈벨트는 22살인 1880년 당시 3만달러(현 싯가 78만달러)를 주고 한적한 오이스터 베이의 155에이커 부지를 사들였다. 1885년 뉴욕의 건축회사 Lamb & Rich 에 주문해 앤 여왕양식의 저택을 지었다.

 

루즈벨트는 이 저택을 부인(앨리스 해서웨이 리 루즈벨트)의 이름을 따서 ‘리홈(Leeholm)’으로 지었지만 정작 그녀는 입주도 못하고 1884년 사망했다. 루즈벨트는 1886년 재혼하면서 이 저택 이름을 알공퀸 원주민의 추장 이름을 따서 새거모어 힐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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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루즈벨트는 1만9천달러를 들여 저택 확장공사에 들어가 ‘노스 룸’으로 불리는 넓은 거실에 사냥으로 얻은 박제 등과 각국 사절단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전시해 놓았다. 이곳이 ‘여름 백악관’으로 불린 이유는 대통령에 재임한 1902년부터 1909년까지 여름철 많은 외교사절단들이 방문하는 등 집무실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6일 사망한 루즈벨트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영스 메모리얼 세미트리에 묻혔다.

 

루즈벨트는 죽기전 아내에게 “내가 이 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이 아는지 궁금하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루즈벨트가 죽는 순간까지 사랑한 새거모어 힐은 그러나 우리 민족에겐 미국의 처절한 배신으로 나라를 빼앗긴 아픔과 고통이 서린 곳으로 기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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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미주 독립활동의 선구자 윤병구

 

 

윤병구는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개항 이후 일제 침략이 가중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들의 단결과 친목을 도모하는 활동을 벌였다.

 

1903년 8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홍승하(洪承夏) 박윤섭(朴允燮) 안정수(安定洙) 등 예수교 감리교도들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하와이 한인사회의 친목단결, 민지계발(民智啓發)을 이룩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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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에는 하와이 이주 한인들에게 불법적인 인민세를 징수하려는 주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벌여 한인들의 권익을 보호했다. 또한 하와이 오아후 섬의 에와농장에서 정원명 김성구 이만춘 김규섭 강영소 등과 함께 에와친목회를 발족해 신민회의 정신을 잇는 활동을 펼쳤다.

 

1905년 7월에 러일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열리자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국권수호를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08년에는 박용만(朴容萬)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해 그 해 7월 열린 미국 민주당전당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뒤 미주지역 한인단체의 통합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되고,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첫 중앙대의회를 개최할 때 박상하(朴相夏) 정원명(鄭元明)과 함께 하와이지방 대표로 참가해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선발된 12인의 대표와 함께 대한인국민회 헌장(憲章)을 제정하고 세금과 의무금 수납제를 규정하였다.

 

또한 1919년 4월의 필라델피아 한인연합대회에서는 송헌주 김호(金乎)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연합국의 강화회의에 참가할 대표로 지명되었다. 이듬해 대한인국민회의 회장으로 당선되어 4,000명의 회원으로부터 의연금을 받아 2,000∼3,000달러의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조달하기도 했다.

 

 

 

 

 

그 뒤 미주지역에서 목사로 활동하던 중 1945년 4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국제연합 결성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로 선발됐다.

 

대한인국민회는 1921년 자금난으로 해체의 비운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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