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달러의 기적 19] 학위 취득, 그리고 연구소에서 잡은 또다른 진로
 

'8달러의 기적'은 미국 최초로 제3세대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유사합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했습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기자 주)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운 좋게도 미주리 대학에서 유명 내분비선학 교수의 조교가 되고 박사과정을 공부하게 된 나는 아침 6시부터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실험 첫날 생쥐의 껍질을 벗기면서 손을 덜덜 떨었던 일이다.

터너 교수가 배정한 실험실에 들어갔더니 고참 박사과정 학생들이 생쥐 한마리를 쥐어 주면서 앞가슴 껍질을 벗겨내고 젖가슴을 도려내라고 했다. 세상에 쥐를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살아 있는 쥐의 껍질을 벗기는 것도 모자라 그 속에서 조그많고 하얀 젖가슴을 도려내라니! 몇번의 실패 끝에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 일을 해냈다. 을지로 육정목 대로에서 ‘찹쌀떡’이라는 말을 외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나의 삶을 결정한다고 다짐했던 그 마음가짐으로 끔찍한 일을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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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리 대학(University of Missouri). ⓒ 위키피디아
 
박사과정 초기의 생활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공부하랴 아르바이트일을 하랴 살림을 꾸리랴 정신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서로 집에 들어오는 시간과 나가는 시간이 다를 때가 많아 한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얼굴을 볼 시간 조차 없을 정도였다. 학교 공부도 전문분야가 정해지고 나니 각별한 집중력이 필요했고, 이런 저런 필수과목에 대한 스트레스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찰수 터너 교수가 나의 공부에 크게 관심을 기울여 주었고 일상적인 상담까지 해 줄 정도로 잘 대해 주어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머리가 하얗고 걸음걸이가 불편할 정도로 나이가 든 찰스 터너 교수는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유학생인 우리 부부를 자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당시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교수와 학생들이 많았고, 특히 교환 프로그램으로 온 인도 유학생들의 다수가 그의 밑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터너 교수가 내게 유난히 잘 대해 준 것은 누구보다도 아침 일찍 실험실에 가서는 밤늦게 까지 일하고 수업 시간에 충실히 임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나는 늘 그의 지근거리에서 충실하게 조수 노릇을 하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으로부터 뭔가를 배우려 했다.

이 와중에 우리 부부는 첫 아이를 갖게 되었다. 결혼한지 1년만인 1964년이었다. 아들 이름은 지도교수인 찰스 터너 교수의 이름을 따서 찰스라고 지었다. 내 학업에서 은사일 뿐 아니라, 생활까지도 도움을 준 터너 교수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 였다. 찰스가 태어날 때 아내가 입원한 병원의 병원비가 100불 정도였는데, 우리는 그 병원비 조차도 터너 교수로부터 빌린 돈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찰스가 태어난 것은 나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16세에 북한을 탈출하여 사고무친에 적수공권이던 나에게 비로소 완전한 ‘가족’이 생긴 것이다. 한국에서 가족이 없다며 대학입학을 거절당하고, 여권과 비자를 받을 때에도 호적이 없어 얼마나 고초를 겪어야 했던가! 찰스가 태어나던 날, 나는 북에 두고온 가족들을 떠올리며 착잡한 기분에 빠지기도 했다. 부모님이 손자가 태어난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침상 옆을 돌아보면 사랑스런 아내와 아들이, 허공을 응시하면 어머님과 아버님, 그리고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찰스가 태어난 후로 우리 부부는 더욱 바빠졌지만, 어느때보다도 즐겁고 행복했다.

생쥐와 친구로 보낸 박사과정

박사과정 공부는 하면 할수록 흥미로웠다. 터너 교수 밑에서 내가 하는 공부란, 쉽게 말해 어떻게 하면 각종 호르몬을 포유동물에 투입하여 젖의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특정 호르몬을 투입하거나 여러 호르몬을 배합 투입하여 젖의 생산량을 높이고자 하는 연구는 당시 미국은 물론 구라파 국가 등 서구 선진국의 내분비선 학계에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당초 벼농사 밭농사 중심의 가난한 한국을 생각하고 농학을 공부하려던 나는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는 또다른 방안이 동물들에서 나오는 먹거리를 어떻게 증산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집중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게 되었다. ‘전혀 다른 방향’이란 인구의 자연 증가를 억제하여 한정된 먹거리의 배당을 늘리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증산’을 염두에 둔 ‘호르몬 조절’ 연구는, 역으로 ‘감산’을 연구하는 학문인 피임과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박사과정에서 집중 공부한 호르몬 조절에 관한 연구는 결국 나의 전문분야가 된 경구피임약 개발로 귀결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상술하기로 한다.

젖을 생산하는 포유동물의 호르몬 조절을 통한 먹거리 증산과 관련된 실험의 한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보통 쥐 한 마리는 14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는다. 이 가운데 6마리는 없애고 8마리만 남겨둔다. 이 새끼 쥐들을 어미 쥐와 밤새 격리시켜 놓고 다음날 새벽에 1시간 정도 젖을 먹여 몸무게를 재어 전체 새끼 쥐들이 흡수한 젖의 양을 측정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어미 쥐에 특정 호르몬을 투입하여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새끼 쥐들에게 젖을 먹인 뒤 새끼 쥐들의 전체 몸무게를 다시 측정한다.

결국 두 차례의 서로 다른 실험에서 측정된 새끼 쥐들의 몸무게의 차이를 통해 특정 호르몬이 어미 젖을 증가시키는데 얼마나 효력을 발휘했는 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연구는 서로 다른 호르몬제를 투여했을 때 젖의 양이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대한 것으로, 장래에 획기적인 호르몬 발견 또는 개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당시 나의 학업 가운데 한가지 예를 들었지만, 어떤 과목의 수업이든 나의 관심 분야는 어떻게 하면 인간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느냐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었다.

박사과정 중 가장 힘들게 공부한 과목은 생화학(bio-chemistry)이었지만, 대부분의 과목들은 매우 즐겁고 재미있게 공부했다. 이렇게 해서 박사학위 필수 과목들을 마치고 논문을 쓰기 전 마지막 관문인 어학시험과 박사논문 자격시험(qualifying examination)을 남겨 두었다. 당시 상당수의 박사과정 학생들이 두가지 외국어가 필수인 어학시험에 떨어져 낙오되는 경우가 많아서 바짝 긴장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택한 나는 1년여의 공부 끝에 교수가 지정해준 독어 불어 전공 서적을 번역하는 어학시험을 통과했고, 전공분야 과목을 테스트하는 박사논문 자격시험도 무사히 통과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관문은 논문이었으나 논문도 큰 어려움 없이 끝낼 수 있었다. 평소의 실험 결과를 논문 작성 지침에 따라 정리하는 정도 였다. 논문 최종심사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지도교수를 비롯한 6명의 심사위원 교수들이 소회의실에서 1시간 정도 최종 심사(디펜스)를 마친 후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를 안으로 들게하더니 “닥터 한, 축하하네!”라며 악수를 청했다. 마침내 내 전공분야의 박사가 된것이다. 1967년 봄, 미국에 도착한 지 12년,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2년 8개월만의 일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찰스와 딸 헬렌을 두고 있던 나에게는 생애 최고의 봄날이었다.

그날 우리는 집에서 조촐한 자축 파티를 했고, 나는 한국의 장인 어른에게 전화하여 학위 취득을 알렸다. 귀한 딸을 ‘삼팔 따라지’에게 결혼시키고 내심 못마땅해 하시던 장인 어른은 크게 기뻐하시며, “영어를 배워 딸과 손주들을 보러 미국에 가겠다”고 하셨다. 애석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 어른은 별세하여 미국에 오시지 못했다. 그해 봄 아내도 미주리 대학에서 가정경제학 석사를 취득하여 겹경사가 났다. 두 아이들을 키우며 아르바이트 잡일로 나를 뒷바라지 하고 석사 학위까지 취득한 아내가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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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봄, 나는 미주리 대학에서 내분비선학(Endocrinology)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도착한 지 12년,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3년여 만의 일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찰스와 딸 헬렌을 두고 있던 나에게는 생애 최고의 봄날이었다. ⓒ 한도원
 
미주리의 봄날… 나는 박사, 아내는 석사

아내와 함께 학위를 마친 우리는 일단 한국의 대학에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하고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몇몇 한국인 교수들과 서울의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날아든 소식은 하나같이 실망스런 소식들이었다. 나의 전공분야의 자리가 많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도 학연이라는 연고주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자기학교 출신을 뽑기 때문에 나에게 차례가 돌아오기는 힘들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교를 합격하고도 ‘뿌리도 없고 돈도 없다’며 입학을 거절당한 처지에서 유학을 왔고, 대학과 대학원을 모두 미국에서 마친 내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공부하느라 빚까지 지고 있던 우리는 미국 여기 저기에 일자리 응모 원서를 보냈다. 하지만 어느곳도 오라는 데가 없었다. 학위를 마쳤으나 당장 렌트비와 식구들 입에 풀칠을 걱정할 처지가 되니 저으기 당황스러웠다.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몇몇 연구소에 박사후 과정(post-doc) 일자리를 응모했다. 그러던 어느날, 보스턴의 워세스터 재단 (Worcester Foundation) 연구소에서 포드 재단 펠로십(Ford Foundation Fellowship)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비록 대형 회사나 대학은 아니었으나 내가 하던 전공분야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1년에 8500불이라는 거금을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일반 대학이나 연구소의 박사후 과정 급료가 연 6000불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화창한 봄 어느날, 우리는 이사짐차(uhaul)를 빌려 보스톤으로 대 이동을 해서는 전혀 새로운 터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전공 분야를 더욱 살찌우게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렜다. 실험생물학(Experimental Biology) 분야의 유명 연구소인 웨세스터 재단은 번식생물학(reproductive biology) 분야의 대가들이 초빙되어 강의를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생물학도라면 한번쯤 와서 연구하고 싶어하는 연구소였다. 특히 최초로 경구 피임약을 개발한 연구소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정식 일자리를 구하다 우연처럼 얻게된 워세스터 재단에서의 박사후 과정은 나의 장래 직업에 중대한 지렛대 역할을 해 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장래 전문분야가 된 피임약 개발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워세스터 재단은 ‘여성은 자기 몸의 주인’이라는 기치와 함께 산아제한 운동의 선구자이자 여성해방운동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마가렛 싱어가 적극 지지하고 후원하는 연구소였다.

생어는 워세스터 재단의 석좌 연구가로 노벨상 후보로까지 거론된 적인 있는 그레고리 핑커스(Gregory Pincus)를 찾아가 먹는 피임약을 개발해 달라고 요청하며 여성을 임신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당시 핑커스 박사는 호르몬 조절로 임신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등 경구 피임약 개발의 대가로 알려지면서 여성해방운동가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핑커스 박사는 호르몬을 조절을 통한 피임약의 개발을 위해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있던 중국 출신의 생물학자 엠시 챙(MC Chang)을 데려올 정도로 경구 피임약 개발에 대단한 열정을 쏟고 있었다.

결국 산아제한을 위한 모금운동 등을 벌여오던 생어를 비롯한 여성해방운동가들과 포드 파운데이션의 적극 지원에 힘입은 워세스터 재단은 막대한 자금으로 경구피임약 개발에 앞장서게 되었고, 1960년 이에 성공했다. 이전에 여성의 난자에서 나오는 호르몬인 프로제스트론(progestron)을 주사액으로 만들어 여성의 몸에 투여했던 것에 비하면 획기적인 것이었다. 프로제스트론은 기본적으로 난자 생산을 방지하는 호르몬으로, 그레고리 핑커스와 엠시 챙의 연구결과에서 입증된 것이었다.

산아제한 연구에 매혹…오르소에 취업하다

여하튼 이 같은 피임약 분야의 대 연구가들이 버티고 있는 워세스터 재단에는 200여명의 연구원들이 근무하고 있었고, 나도 그들 가운데 끼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맛보게 된 것이다. 전반적으로 번식학(reproductive biology) 연구기관인 웨세스터 재단에는 경구 피임약 개발을 위해 12명의 연구원을 따로 두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고, 이 연구소에서 받은 경구 피임약 분야에 대한 학문적 자극은 사실상 나의 장래 연구에 중대한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워세스터 재단에서 2년 정도 연구원으로 근무한 후에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정식 직업을 구하기로 하고 나의 전공과 관련하여 미국 전역은 물론 해외에도 취업지원서를 보냈다. 이번에는 얼마지 않아 네곳의 회사에서 답신이 왔다. 나와 아내는 어느 회사를 선택할 지를 놓고 장시간 논의했다. 우리는 파리의 한 사설연구소를 우선적으로 제외했다. 아이 둘을 가진 형편으로는 해외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고, 언어도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회사였는데, 동부에서만 주욱 지내온 우리가 서부로 멀리 옮겨가서 다시금 새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또한 제외하기로 했다.

이제 남은 곳은 오하이오의 신시내티의 회사였다. 아내와 나는 두 회사를 놓고 저울질 하다가 결국은 뉴저지에 있는 오르소 제약회사(Ortho Pharmaceutical Co.)로 가기로 했다. 오르소 제약회사는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적 제약회사인 존슨앤존슨의 계열사였다. 내가 오르소 제약회사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박사후 과정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한 워세스터 재단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워세스터 재단에 있는 동안 경구 피임약 분야의 연구에 큰 매력을 느껴 왔었고, 거기에는 나의 멘토인 게이블 바이얼리(Gable Bialy) 박사가 있었다. 사실상 내가 오르소 제약회사를 선택한 결정적 계기는 게이블 박사 때문이었다.

어느곳으로 갈 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날, 나는 게이블 박사를 찾아가 의견을 구했다. 그는 나 스스로에게 세가지 질문을 해 보라고 했다. 그 질문이란, ‘장래에 노벨상을 받기를 원하나?’, 아니면 교수가 되고 싶은가?’, 그도 아니라면 ‘연구가로 생을 마칠 생각인가?’ 였다. 나는 오로지 내 분야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오르소야말로 연구에 매달리기에는 최적의 회사라고 추천했다.

이렇게 해서 선택하게 된 오르소 제약회사는 나의 평생 직장이 되어 우리 가족에게 삶의 터전은 물론이요 일생일대의 보람과 영예를 안겨준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구술 정리 및 스토리 재구성 : 김명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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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슨앤존슨 계열사인 오르소 제약 연구원 시절 ⓒ 한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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