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언론인 한반도 통일미래센터 행사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몽골땅에서 가족 재회의 기적(奇跡)을 이뤘어요.”

 

재외동포언론인들이 휴전선 접경지역에서 드라마틱한 탈북가족의 사연을 청취했다. 2016 재외동포언론인심포지엄의 일환으로 최근 경기도 연천의 한반도 통일미래센터에서 열린 행사에서 재외언론인들은 탈북강사 박모씨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박씨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지난 2006년 10월 두만강을 넘어 탈북, 이듬해 한국에 정착했다. 한국에 오기전 그녀는 몽골의 탈북민캠프에 머물다 기적과도 같은 가족 상봉을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할 수 있었다.

 

이밖에 박씨는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시작된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수많은 죽음을 목격해가슴속 상처로 남은 일, 한국드라마 등 한류가 이미 90년대부터 북한에서 퍼졌으며 남한의 압력밥솥이 미혼여성들 사이에 최고의 혼수품이 된 사연, 북한에 있는 가족과 비밀리에 휴대폰 통화를 하는 등의 사연을 들려주고 질의응답(質疑應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박씨의 육성 증언과 질의응답.

 

“할아버지가 지주였다. 할아버지는 40대 초반에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는데 생사를 모른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출신성분이 아주 안좋았다. 철 없을땐 평양 도심에서 교통정리하는 교통경찰이 꿈이었다. 외동딸이 꿈을 얘기하니까 어느날 엄마가 울면서 ”너는 출신성분이 나빠서 교통경찰이 될 수 없으니 단념하라“고 했다. 커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 남자는 아버지가 당간부 출신으로 출신성분이 좋았다. 이 남자와 결혼하면 나도 좋은 성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5년간 연애를 하고 남성의 집에 인사드리러 갔는데 우리 집안 성분을 알게 된 남자 집안에서 다시는 오지마라 하더라. 출신성분이 안좋은 사람과 결혼하면 좋은 사람도 내려간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출신성분은 결혼해 2세를 낳아도 3대까지 간다.

 

사랑하는 남자도 만날 수 없는데 왜 이땅에서 살아야지? 몇날 며칠 고민했다. 남조선에 가보자 결심했다..또 큰 동기가 된게 북한에서 한류열풍으로 90년대 남한드라마 많이 들어왔다..북한 가부장적 나라인 반면 남한은 엄마들이 하늘같은 서방님 뺨도 때린다..한편으로 얼마나 자유로운 세상이면 자기 표현을 맘대로 다할까.. 같은 세상에 낳는데 왜 난 저렇게 못살까 천국같은 세상 가고 싶었다..어느날 남자친구 만나서 “오빠(북한에서도 말투가 연인간에도 동무동무 했는데 남한의 영향을 많이 자기야, 오빠 이렇게 바뀌었다.), 한가지 얘기할게 있다..남한땅에서 사랑을 해보면 어떨까?” 말했다. 남자친구는 “탈북을 한번도 생각못했다. 더구나 부모님 두고 올 수 없다”고 하더라..그래서 알았다. 난 며칠있다가 갈거다 말했다. 사흘후 연락왔다..함북 무산은 좁은 동네라 남녀가 갈라져도 매일 한번은 만나게 된다..남자친구가..네가 대한민국 가면 다시는 못보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너를 따라서 탈북을 결심해보겠다고 했다..제일 안전한 브로커 찾아서 탈북하게 된다..두만강은 하도 많은 사람들이 도망을 가서 도망강이라고 부른다. 두만강 국경경비대는 정말 무서운데 돈을 주면 세상에 없는 천사처럼 잘해준다. 둘이 탈북하면 ‘커플세’를 더 내야 한다.

 

2006년 10월이었는데 북쪽이라 살얼음이 얼고 남한날씨로 치면 1월이었다. 뼈가 끊어지고 살이 찢어지는 추위를 느끼며 100m 내려가는데 물에 젖은 바지가 꽁꽁 얼어서 “샥샥” 소리가 났다. 브로커가 다른 국경경비대에 들킬까봐 바지 벗으라고 했다. 창피한것도 모르고 벗어 들고 내려갔다. 탈북후 7일간 있다가 북경으로 갔다..거기에 9명의 그룹이 있었다. 그날 자고 브로커의 차를 타고 내몽고를 거쳐서 몽골에 갔다..거기서부터는 운에 맡겨야 한다. 몽골 국경철조망에 내려주더니 알아서 가라고 했다. 2m 높이의 철책을 어떻게 넘어가지..하다가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올라갔다. 나만 올라간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도 모두 올라왔더라.

 

천신만고 끝에 몽골 탈북민 캠프로

 

몽골땅에서 고생 엄청했다..중국에선 안잡히는게 목적이지만 몽골에서 (남한에 가기위해) 잡히는게 미션이다..24시간 걷는데 개미 한 마리도 안보였다. 잡아가주세요 하고 소리치는데도 잡아가는 사람이 없다. 밤을 새고 계속 “노스코리아에서 왔다”고 외쳤더니 “안녕하세요 북한에서 왔습니까?”하고 한국말 하는 사람 만났다. ‘양탄굴(양주만 계속 마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곳에 가서 인터뷰를 하고 숙소로 옮겨졌는데 문을 여니까 1층 2층에 머리풀어헤친 여자들이 40-50명이 쳐다봐서 깜짝 놀랐다..탈북자들이 이렇게 많은줄 몰랐다..오는 순서대로 빠졌는데 한달간 있다가 울란바토르 난민촌에 옮겨졌다..거기는 300명이나 되는 탈북자들이 집결했다..이곳은 대한민국 오기위해 준비하는 전 단계인데 첫 인터뷰에서 태어난 이후 기억나는 모든 것들을 적어서 제출했다. 그곳에서 남자친구가 똘망똘망해보였는지 300명의 반장 시키더라. 전임 반장이 일을 돕느라 6개월간 한국에 못가고 있었다.

 

몽골은 사막이 많으니까 초소가 많아서 탈북자 찾으면 명단 정리 한다. 한달후에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남자친구 부모님 동생 이름과 생일이 똑같은 사람들이 명단에 있었다. 남자친구 아버지는 당간부 출신에 한국드라마 보면 당장이라도 신고할 사람인데 탈북했다는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하지만 온 가족 이름이 똑같을 수 있나..하루하루 기다리면서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소리가 나왔다. 남자친구가 나를 따라오긴 했지만 부모님을 영원히 못볼거라고 죄책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 부모님보다 남자친구 부모님 온다는게 너무 기뻤다. 그분들을 뵙고 정말 눈물이 나서 천국같은 날이었다..그렇게 좋은 세월 보내는데 어느날 명단에 친정부모님 이름이 보였다..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다.. 북한엔 종교 없지만 무릎꿇고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우리 엄마 빨리 보게 해달라.. 20일 넘게 있다가 딱 나오는데 머리가 하얀 백발에 새까맣게 탄 사람이 보였다..8일을 걸었다고 했다..깔창 다 떨어지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못알아볼 정도였다..탈북자중 몽골을 통한 사람들이 제일 고생한다는데 제일 마지막에 하얀 분이 엄마였다. 3개월만에 엄마를 만나서 펑펑 울었다.. 어떻게 이런 기적같은 일들이 연달아 생기는지..다른 사람들 너무너무 부러워했다..

 

그런데 거기서 전쟁이 또 시작됐다. 몽골땅에 오니까 저희 어머니가 남자친구를 반대한 것이다. “남한땅에 오면 한국 젊은이 만나야지 헤어져라”고 했다. 남자친구 집에서도 “우리 아들이 병신도 아니고 너희땜에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 되냐”고 하고. 행복한 시간 그치고 지옥이 됐다..어머니 반대로 화장실도 지그재그로 보낼 정도로 감시(監視)당했다..그러다 한국에 와서 하나원에 들어왔는데 나중에 교육 끝나고 집 배정하는데, 남친 집이 서울 양천구가 되니까 엄마는 일부러 멀리 간다고 경기도 부천으로 했다. 막상 거보니 10분거리더라.(웃음) 둘이 만날까봐 밖에도 못나가게 하고 유일하게 인터넷으로 소통하며 서로 이메일 주고받았다. 언제가는 함께 하겠지..소망하며 이메일 주고받았다..그러다 엄마가 보면 바로 인터넷 창 닫아버리고. 그렇게 2년간 좋아하니까 결국 허락받았다. 지금 아들딸 낳고 잘 산다..(웃음 박수..)”

 

박씨는 이날 자료화면을 곁들여 북한의 생활 문화 등 남한과 많이 다른 실상을 소개하기도 했다.

 

북한 최고의 기술은 마약제조?

 

“북한에서는 5살부터 우상화교육을 한다. 북한 전역에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3만8천개다. 북한 가장 뛰어난 기술이 뭔지 아나? 마약이다. 함흥에서 마약 만든다. 두 번째 잘하는 기술이 동상 만들기다. 눈이오거나 비가 오면 동상이 자동으로 아래로 내려간다..계절마다 옷갈아입히고 명절이나 생일, 결혼하면 동상에 꽃다발 바친다. 어릴적 충성심 길러주고 새벽 6시엔 동상 주변 자발적으로 청소한다..이런 일도 있었다. 북한엔 도둑이 많아 집을 못비우는데 어느날 8살 아이가 집을 지키다 불이 났다..불을 피해야 하는데 아이 눈에 김일성 초상화가 보인거다 사진도 신적인 존재인데 불이 나면 초상화가 타니까 이불과 베개 밟고 올라갔다. 초상화까지깨지면 잡혀가니까 안떨어지게 끈으로 꽁꽁 묶어놓은거다. 그게 안풀리니까 아이가 결국 초상화 끌어안고 죽었다. 이 아이의 영웅적 행동을 따르라고 선전하며 아이학교 이름을 영웅소학교로 바꿨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우상화교육으로 자기도 모르게 목숨 바치는 행동도 한다..”

 

박씨는 “북한에서 군사복무가 10년에서 12년으로 늘어났는데 입대할 때 남자는 여자친구에게 ‘기다려줄수 있니?’하고 묻는게 프로포즈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북한여성은 못기다린다고 말한다..“제대하면 사회 적응도 잘 못하고 그래서 미혼여성들은 군대 갔다오지 않은 사람 만나길 원한다. 90년대 이후 군에 가서 하도 영양실조 많고 건설현장 나가 다치고 해서 돈있고 빽있으면 안가려고 한다 대학졸업자 10%도 안된다 졸업해도 할수 있는게 없다 집단취업 많이 시킨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후 북한에서 식량배급이 딱 끊겼다..옥수수 17kg 받았는데 한달간 세식구가 먹고 살다..배급 주겠지 주겠지 하다 1년이 지났다. 94년부터 99년까지 3만여명 굶어죽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했다. 종자돈 만들어서 시장에 나가서 하루하루 연명 탈북자 생기기 시작했다. 북한체제가 나빠서 그런게 아니라 내 가족 먹여살리려고 중국에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중국과 북한을 오가면서 몸만 넘어온게 아니라 외부 정보를 갖고 들어오게 됐다. 입소문 통해 남한드라마가 알려지고 한류열풍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남한 드라마 얘기가 일상” 북한가족과 휴대폰 통화

 

나도 남한 드라마가 탈북 결심의 한 이유였지만 ‘천국의 계단’ ‘가을동화’ ‘올인’ ‘장군의아들’ 이런거 다 봤다. 그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게 ‘천국의 계단’, ‘가을동화’였다. 사랑을 위해 목숨거는거 보고 북한 젊은층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신선하고 놀라왔다..북한 드라마는 김일성 김정일 위해 목숨거는것만 있다. 남한 TV프로 보면서 요리에도 많이 관심 갖게 됐다. 북한의 가족들과 전화통화도 된다. 대화 내용이 엄마 아빠 살았냐 죽었냐 그런게 아니라 요즘 드라마 얘기 많이 한다..‘태양의 후예’ 했을 때 친구가 북한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유시중이 죽냐 사냐“ 물어보셨다고하더라. 또 어느 영화에서 무슨 요리가 나오는데 레시피가 뭐가 들어가냐? 물어보시더라..

 

남한 쿠크 밥솥 북한 최고의 인기혼수품

 

“아랫동네(남한) 물건만 전문으로 파는 시장에선 한국물품 없는게 없다. 요즘 쿠크 밥솥과 디지털카메라, USB를 제일 선호한다. 옛날엔 냉장고 TV였지만 요즘은 쿠크밥솥이 최고 인기 혼수품이다. 북한에서 한달월급 5천원인데 쿠크밥솥이 150만원 한다..쿠크로 하면 잡곡밥 푹 찧어서 찰지게 나온다..북한에서 생산쌀 모자라서 수입한 중국쌀을 다른 밥솥에 하면 안남미처럼 푸실푸실한데 쿠크밥솥은 찰지고 맛있게 나온다..옛날엔 명절이나 생일에 사진관 가서 사진 찍었는데 요새는 디지털 카메라로 젊은 층이 자기 일상을 담고 있다. 삼성 LG TV 믹서기 행주 장갑, 은나노 도시락도 인기있다. 북한 친지들이 남한 드라마 주인공이 입는 옷을 부탁하기도 한다. 주유소와 노래방 당구장 오락실이 많아지고 젊은층은 당과 국가를 위해서가아니라 나자신 위해서 산다. 남한의 실상을 인식하고 있다.

 

3개월전 탈북한 친구를 봤는데 손톱에 매니큐어 반짝 바르고 큐빅도 했더라. “넌 겨우 3개월 됐는데 이런걸 했냐고 했더니 북한에 있을때부터 남한 드라마 보고 한다고 하더라. 서울말도 나보다 잘한다. 한국에 오려고 5년전부터 연습했다고 한다. 이 친구 함북 혜산 출신인데 밖에서 보면 탈북자인거 전혀 모른다..90년대는 생존을 위해 탈북했고 2000년대는 사랑과 자유 위해 탈북했다면 요즘은 아이들의 미래와 자녀교육을 위해 탈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북한의 안전원들이 더 한국상품에 빠져 있다. 북한에 있을땐 커피를 모르고 살았다. 커피를 처음 얻었을때 용도를 몰라서 밥솥에 끓여서 설탕 반 넣고 보약인줄 알고 먹었다..요즘 북한 사모님들은 맥심 커피로 기분좋은 아침 시작한다. 쇠고기 다시다로 맛을 내고 요새 오뚜기카레 유명하다더라. 아름다운 피부 위해 한국화장품 선호한다.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화장품 개성에서 나오는거 있지만 남한 것이 최고다. 한국상품 좋다는거 세 살난 아이들도 안다. 유치원 갈 때 고소미 쥐고 가는게 유행이다. 못가진 애들 따돌림 당할 정도다. 생일에 집에서 뒤풀이할때 남한 춤이나 노래 못하면 축에도 끼지도 못한다. 옷스타일도 남한 스타일이 유행이고 옛날에 그런 옷입으면 자본주의 날라리 풍이야 그랬다. 개성고려인삼화장품 대동강라면 등 한국 모방 많이 한다. 개성공단 시절 종업원들에게 초코파이 줬는데 너무 좋아하니까 공급 중단 했다. 북한 전역에 와이파이 설치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한류열풍이 북한을 무너뜨린다고 본다..북한에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한다..한류로 인해 금세 통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같은 민족으로 한국사람으로서 몽골에 있을 때 나라 잃은 설움 많이 느꼈다..몽골에서 인격모독 너무 많았다. 몽골에서 말똥 연료로 많이 사용하는데 자기들은 집게를 사용하면 우리는 손으로 들게 했다. 생수병 하루에 하나 줘서 얼굴 겨우 닦았다. 대한민국에 와서 아이들 두명 낳고 행복하게 산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가장 중요하다..통일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 통일에 대한 관심을 탈북자에 대한 애정 가져달라.”

 

* 글로벌웹진 뉴스로 www.newsro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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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북한 가족과 카톡도 해요”

 

재외동포언론인들은 특강후 탈북강사에게 연이어 질문을 하며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 북한에서 휴대폰 통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중국 브로커중에는 탈북시켜주는 브로커가 있고 핸드폰 조달(調達) 브로커도 있다. 돈을 주면 중국 핸드폰에 칩을 끼어서 북한 친지에게 보낸다..북한 가족과 카카오톡도 할 수 있다. 북한 전 지역에서 할 수 있는건 아니고 무산이나 신의주, 나진 지역에서 가능하다. 통화할때는 산같은데로 두시간씩 걸어와서 하는 경우 많다..

 

- 탈북 비용은 어떻게 드나

 

“나는 2006년에 750불 지불했다. 중국에서 한국 오려면 250만원 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정착후 갚겠다는 각서 써야 한다..한국서 정착금 받으면 브로커가 귀신같이 알고 연락온다. 경기도 부천에 가니까 10분만에 따라붙더라. 목돈을 줘야하니 다음날부터 일을 안할 수 없다..(이같은 행태를 막을 수 없냐는 질문에) 통일부에서도 막을 수가 없더라. 요즘 탈북비용 2천만원이다. 브로커는 북한, 중국사람이고 한국사람은 못봤다..”

 

- 탈북하면 남은 가족이 처벌을 받지 않나?

 

“옛날에 제재했다..요즘 함북 무산엔 한집 건너 한명이 탈북했다..북한당국도 뻔히 안다..단속자 피단속자간에 뇌물로 해결하기도 하고 탈북하면 대부분 사망처리한다..북한은 도로가 안좋아서 차량사고 많다 기차사고도 많고..남남북녀 TV프로그램에 나온 친구 있는데 그쪽에 고향 부모님도 있지만 뻔히 알면서도 제재는 크지 않다..가서 조사는 받았는데 크게 문제는 안된다..알아도 모른척 하는 경우 많다..”

 

- 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 시절에 어떤 상황이었나?

 

“94년 중학교 막 올라갔을 때 한반 정원이 45명이었는데 학교 나오는 친구가 7-8명에 불과했다. 어쩌다 나오고 한달 못나오기도 하고 그게 일상화됐다. 학교에 통 못나오는 친구가 있었다..형제만 6명인데 친구가 맏이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 친구 아빠가 자강도로 식량 구하러 갔는데 소식이 없었다. 한달에 한번이라도 나오면 죽지 않은건데 이 친구가 너무 못나오니까 선생님과 친구들 8명이 찾아갔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더라. 열고 들어가니 친구와 동생, 엄마 다섯명이 누워있었다. 어린아기 막내가 앙하고 우는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결국 막내하고 애기만 살고 엄마하고 네명 형제가 다 굶어 죽었다. 학창시절에 꿈보다 이런 죽음들이 일상이었다..공개총살 등 사형같은것도 많이 했다. 그때 탈북자 잡으면 나라를 배반했다고 정치범 수용소 교화소 보내는데 이 사람들이 나라가 싫은게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간거다..끔찍한 교수형도 보고 정말 어떤때는 자다가 꿈에 나타날 때 있다. 가끔 동창모임하면 30명이 모이는데 그런 악몽 많이 꾸는 사람 많다.. 지금도 시달린다..”

 

- 현재 탈북민이 3만5천여명에 달하지만 북한에 다시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솔직히 여기서 살다가 북한으로 가라면 단 한명도 없다고 생각한다..자식을 놓고 협박하는 경우 있다. 통화를 할 때 보위부가 옆에서 협박한다. 어느 아들이 엄마하고 통화하는데 도청으로 걸렸다. 다음에 통화 할 때 시킨다. ‘엄마가 안오면 나 죽인데..장군님 품에 들어오면 받아들인다. 돌아와라. 아들을 놓고 협박한다..보위부가 옆에 있다.. 그렇게 해서 돌아가는 경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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