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자와 희생자’ 즈뱌긴체프 기고문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의 위성국가화’

 

 

Newsroh=김원일 칼럼니스트

 

 

“일본이 항복해야한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전쟁 포로와 민간인 억류자의 학대 관련 문서와 다른 증거를 파괴하기 위한 조직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국방 장관은 전군 간부들에게 즉시 모든 기밀 서류를 소각(燒却)하도록 명령했다...소련군이 빠르게 진격해오자 일본 전범들은 하얼빈 지역의 생물 무기 공장을 폭파시켰고, 다른 지역들에서도 생물무기의 존재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르 즈뱌긴체프 국제검사협회 부회장이 러시아 일간 로시스카야가제타에 실은 ‘침략자와 희생자’ 제하의 기고문에서 일본군국주의의 탄생 배경과 오늘날 다시 군국주의의 향수속에 되살아나는 망령적 작태를 진단했다. 기고문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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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범기(욱일기)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정부 대표가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이로써 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이보다 약 한달 전인 8월 9일 소련군은 만주에서 일본군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6일 후인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발표되었다.

 

 

일본 군국주의 제국

 

유럽에서 파시스트 독일에 대한 서방의 승리처럼, 아시아에서 군국주의(軍國主義) 일본에 대한 승리를 거두는데도 세계 여러 국가들이 지나치게 큰 희생을 치렀다. 그런데 일본은 어떻게 이런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세계 질서 개념의 중심에는 미국과 유럽의 식민 통치자들로부터 아시아인들을 해방하고 그들을 공영권으로 규합한다는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은 ‘극동’이라는 단어가 이 공영권을 규정하는 정의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이것은 적이 만든 단어인 유럽 용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군국주의의 시초를 설명했다.

 

이런 일본의 계획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주의에서 해방하고 몇 나라에게는 독립을 제공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강력한 통제하에 그 국가들을 휘어잡아 무력한 위성국가로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즉 "일본 군국주의 제국"의 사상적 기초는 독일 파시즘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 사상은 일본인들의 특별한 우수성과 다른 민족을 예속시키고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계 통치권을 획득하고 세계 민족들을 노예화하며 ‘선택된 강자’는 ‘하등민족’들에 대해 아무런 규칙이나 도덕적 기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권리를 확신하는 목표를 세웠다. 일본인들은 다른 민족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그들에게 허용된다는 확신을 배웠다. 이러한 절대적인 사상적 명제를 알 때 일본군 병사들과 장교들이 전장에서뿐 아니라 점령지 도시와 마을들에서 행한 잔혹한 결과를 초래한 배경이 무엇이었는가를 많은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이를 "대동아 공영권"의 창설이라 선언했고 이에 따라 1910년 한국 합병에 뒤이어 호주, 필리핀, 버마, 태국, 뉴질랜드, 그리고 중국 일부를 합병했다. 이 계획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서양의 식민주의에서 해방하고 몇몇 국가에게는 독립을 제공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일본의 강력한 지배하에 사로잡아 무력한 위성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숨겨라”

 

독일 최고 사령부는 1941년 5월 13일 지지서에서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선언했다. “적대국 민간인에 대한 군인들과 군무관들의 행위를 기소하는 것은, 이 행위들이 전쟁 범죄인 경우에 조차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일본군 사령부와 군국주의 사상은 이 점에서 독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국제 군사 법정(IMT)은 선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본이 항복해야한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전쟁 포로와 민간인 억류자의 학대 관련 문서와 다른 증거를 파괴하기 위한 조직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국방 장관은 전군 간부들에게 즉시 모든 기밀 서류를 소각(燒却)하도록 명령했다. 바로 당일에 헌병대장은 각각의 헌병대로 대량의 문서를 효과적으로 파기하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한 지시서를 발송했다. 전쟁포로 수용소 총괄 담당 부서장은 1945년 8월 20일 포모사섬 주둔 육군 대대장에게 순환전보를 보냈다. 이 전보에는 “적의 손에 들어가면 아군에게 불리할 수 있는 문서들은 사용 후 파기해야 할 기밀문서와 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지침이 적혀 있었다.

 

소련군이 빠르게 진격해오자 일본 전범들은 하얼빈 지역의 생물 무기 공장을 폭파시켰고, 다른 지역들에서도 생물무기의 존재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미처 이 작업을 완전히 마치지 못했고 소련군은 관동군 사령부 특히 야마다 총사령관과 군의학 및 수의학 업무 부서장들의 범죄 활동에 대한 대량의 문서와 증거들을 압류하고 이를 대중에게 공개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도쿄는 정부 군기관들에서 소각하는 서류들에서 나오는 연기가 만드는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범죄의 흔적을 지우는 중이었던 것이다. 소련군이 확보한 서류에는 사령부의 명령과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명령서는 매우 중요하고 직접적인 내용을 거론해서 전범재판 법정은 선고에 필요한 다음과 같은 부분을 거기서 찾아 통째로 전체를 인용했다: "전쟁 포로 및 민간인 피 억류자를 학대하거나, 대대적인 불만의 대상인 자는 즉각적으로 다른 곳으로 피하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숨을 수 있다.“

 

일본 군국주의가 펼친 전쟁의 결과로 일본인들은 엄청난 손실을 겪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다른 민족이 겪은 고통은 이보다 훨씬 더 컸다. 특히 중국은 1억 명이 주거지를 빼앗겼고 수백만이 죽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가 2백만 명이 죽는 큰 손실을 체험했고 필리핀도 11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전쟁의 유골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나치의 제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동료 전범들과 감옥에서 그들을 담당했던 미국 심리학자들에게 조금만 시간이 더 흐르면 독일민족이 히틀러 제국의 영웅들을 위해 판테온 신전을 건설하고 그 신전 안에 그들의 유골을 담은 대리석 항아리를 봉안(奉安)하고 그들을 영원히 신으로 숭상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괴링의 계산은 틀렸다. 뉘른베르크에서 처형된 전범들의 유골은 다 폐기되고 그들을 교수형에 처했던 줄만 남았다. 그러나 그런 괴링도 그의 판테온에 대한 망상이 일본에서 실현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도쿄 전범 재판에서 선고를 받은 자들의 유해를 훔쳐내어 보관하는데 성공했다는 소문은 일본에서 항상 존재했다. 1960년 8월 16일 나고야시 근교 미케노야마 산 정상에 1948년 교수형을 받은 7명의 일본 전쟁 주범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기념비 제막식에서 그들에 대한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기념비에는 “7명의 사무라이-순교자들의 묘”라는 묘비명이 새겨졌다. 또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인도, 필리핀 11개국이 극동 국제 전범 법정을 설립하고,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불가침 협정 위반, 그리고 필수 물자 부족으로 인해 패전한 일본의 행위에 대해 재판했다”는 글과 “우리의 눈을 들어 멀리 태평양을 바라보고 전쟁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는 글이 새겨져 있다.

 

1964년에는 2차대전에서 전사한 약 2백만 일본인의 사후 포상이 이루어졌다. 당시 인간 어뢰 훈련을 시켰던 일본 참전군인인 하시모토는 “일본군 잠수함 함대는 완전히 전멸했지만 불멸의 잠수함 선원들의 영혼은 우리와 함께 아직도 광활한 대양에 살고 있다. 우리는 태평양, 인도양 및 대서양에서 잠들고 있는 수많은 용감한 군인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해저에서부터 그들의 속삭임이 우리들의 귀에까지 들린다”고 썼다. 또한 교과서는 일본의 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일본의 침략을 받은 국가들의 공식 항의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다시 기술하고 있다. 군국주의 문학의 물결도 다시 거세지고 있다. 이 문학의 주류는 2차 대전에 관한 것으로, 일본 군인들의 해상, 공중전, 육상전, 수중전 무용담을 끝도 없이 찬양하는 내용이다. TV 드라마와 영화 스크린에서는 대일본제국의 용감한 병사들의 행진이 다시금 방영되고 있다.

 

도쿄 호세이 대학교 코바야시 교수는 도쿄 전범재판을 다룬 영화 촬영 당시 다음과 같이 시인한 바 있다. “일본인들 특히 젊은 층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전쟁에 대해서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 이것이 일본 사회의 주요 문제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또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건은 전쟁의 다른 사건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별개의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서는 현재 일본 내에서는 전반적으로 거의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평범한 일본인이 전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하면, “우리, 일본인들이 바로 전쟁의 희생자”라는 감정이 생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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