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코리아포스트)  밖은 비 바람이 사납다. 오늘같은 날, 밖에 볼 일이 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둠침침한 집안에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옷을 두둑히 입고 앉아 있는데 있을수록 더 춥다. 아랫도리가 얼어오는데 견딜수가 없다.

 

뉴질랜드의 겨울 추위는 비 내리는 날, 가히 공포스럽다. 평생 몸에 베인 절약정신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히터의 스위치를 맨 위까지 거침없이 올렸다. 

 

그래봐야 집 안 가득 비춰주는 햇볕을 따라잡기엔 어림도 없다. 차라리 빗속으로 나서서 정면으로 도전하는게 낫겠다는 유혹이 밀려온다. 포근한 카페 의자에 파묻혀서 따끈한 커피라도 한잔 마시면 이 추위를 잊을 것만 같다.

 

서둘러 중무장으로 챙겨입고 밖으로 나섰다. 난로앞에서 달아올랐던 양 볼에 찬바람이 상큼했다. 늘상 냉방으로 썰렁하던 버스 안이 오늘은 방 안 보다 더 훗훗했다.(역시 나오길 잘 했구나) 슬며시 마음이 바뀌었다. 

 

목적없는 방황속에서 즐기는 낭만. 빗속의 나그네?. 생각을 하니 꽤 기분이 가벼워졌다. 기차로 바꿔 탔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니 사람도 별로 없다. 

 

텅 빈 공간이 불빛 속에 화안했다. 내가 마치 이 큰 차량 하나를 전세 낸듯 넉넉하고 편안했다. 사나운 비 바람속에. 발품을 팔아서 얻은 이 조그만 평화에 부풋한 감동이 왔다. 움츠렸던 어깨가 화알짝 펴졌다.

 

이 기찻길엔 없어서 아쉽지만 좋아하는 갈대의 꿈을 더듬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잿빛 하늘밑에 웅크려 앉은 낮은 집들. 시퍼런 나무들이 모진 매를 맞으며 앙탈하듯 몸을 흔들어댄다. 

 

달리던 차가 잠시 멈추었다. 

 

새로 올라타는 어떤이가 가볍게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며 앞자리로 가고 있었다. 드디어 내 전셋방(?)에 무단 침입자가 생긴 것 인가. 문득 그의 발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찐한 오렌지의 빛깔이 형광색으로 눈이부신 운동화. 그 화사한 빛깔이 그의 전체를 화려하게 돋보이고 있었다.

 

“또옥 똑 구두소리... 빨강구두 아가씨....”

 

젊었을 때. 유행했던‘빨간구두 아가씨’란 노래. 가수‘김상희’가 불렀다. 경쾌하고 명랑해서 쉽게 따라불렀던 생각이 난다. 예전엔 구두하면 보통 검정 아니면 갈색정도. 여름엔 백구두가 주류였다. 

 

빨강구두는 정말 특별한 멋쟁이 아가씨들이나 신었다.

 

“한번쯤 뒤돌아 볼 만도 한데... 발걸음만 하나둘 세며 가는지...”멋쟁이 아가씨를 선망했던 젊은 남자들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그런 시절에 어느 오십대 아줌마가 빨강 구두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이야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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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니 본 것은 많아 노상 촌뜨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멋하고는 담을 쌓고 살던 사람이었다. 전업 주부의 주책이었을까? 반란이었을까? 일상의 굴레를 잠깐 벗어버린 일탈이었을 것이라고 지금 생각한다.

 

어느날인가. 모처럼 시내에 나갔다. 인사동 근처였던것으로 기억한다. 제법 알려진 양화점 쇼윈도에 화려하게 진열된 그 구두를 발견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빨강 칠피구두. 정중앙에 동전 크기의 새까만 동그라미가 조화의 포인트를 더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굽으로 남으램 할데가 한군데도 없었다.

 

며칠을 그 구두가 눈앞에 어른거려 잠을 설쳤다. 살림에 묻혀서 집안에서만 사는 여자가 어불성설 말도 안되는 이변이었다. 아가씨도 아닌 오십대 주부가 감히 빨강 구두라니... 그걸신고 딱히 갈만한 곳도 있을리가 없다.

 

처음 경험하는 들뜬 마음을 달래느라 많이 애썼다. 자신 속에도 허영끼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래기도 했다. 스스로 철없음을 남으램도 했지만 그 강한 유혹에 끝내 지고야 말았다. 뭔가를 꼭 갖고싶다는 오랫만의 감정. 그 새로운 감정이 고마웠다는게 핑게였다. 그동안 주부라는 틀에 묶어놓고 요지부동으로만 살아왔던 자신임을 깨달았다. 사실 밖을 기웃거려본지도 오래 되었다.

 

벌써 어느 예쁜 아가씨가 그 구두의 주인이 되지 않았을까? 그 때는 가볍게 체념을 하리라. 마음 다졌다. 하지만 그것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이 주인을 기다렸다는듯이...

 

어렸을 때 엄마가 새 운동화를 사 주시면 선뜻 신지를 못했다. 너무 좋아서 몇 밤을 품에 안고 자곤했다.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신장 안에 모셔두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솔직히 말하면 신고나설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민망함을 참고 큰 용기를 내서 신어본게 몇번이나 될까? 젊음을 한참 비껴간 아줌마란 사실에 주눅이들어 챙피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빨강구두를 신고 나설땐 어깨가 쭉 펴졌다. 꼿꼿한 자세로 당당하고 기품있게 자신을 높여 으쓱해 보기도 했던게 사실이다.

 

이민 보따리엔 그게 따라오지 못했다. 이 년만인가 귀국해서 신장을 열었을 때 그 빨강색 구두가 다시 내 눈을 자극했다. 깔끔하게 새 것처럼 포장을 해서 가지고 들어왔다. 지난 세월이 얼마인가. 그 때도 신기 어려웠던 컬러를 지금 신다니... 그건 그냥 내 신장안에 애완용이었다. 지금처럼 컬러의 다양한 물결이 일기 몇해 전. 그 구두는 나와 마지막 이별을 했다.

 

안 입는 옷 보따리에 싸여 빈으로 들어갔다. 온갖 신발들이 컬러의 다양함으로 눈이부신 요즘이다. 눈 딱 감고 한번쯤 신어봤으면 좋았을걸. 혹시 누군가 뒤에서‘빨강구두 아가씨’노래라도 불러줄지 아는가..... 후. 후. 후...

 

어느덧 종착역에 다 왔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유치한 치기의 꿈도 끝이났다. 그동안 비도 멀리갔다. 파아란 하늘에 한 뼘쯤 남은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다.

내 여생도 저 햇살을 닮아 곱고 멋지고 싶다.

 

밝고 아름답고 향기있는 삶을....​ 

 

 

컬럼니스트  오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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