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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강점기인 1943년 5월 촬영을 개시, 9월 개봉한 앙리-조르쥬 클루조(1907-1977년)의 두 번째 작품이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서 해방되자 상영금지조치가 내려진 영화였다. 레지스탕스 지지여론은 나치 정치홍보물이라 낙인찍었고, 나치에 조력한 비시정권 지지층은 프랑스의 이미지를 먹칠한 영화라고 손가락질했다.

1944년 6월 클루조는 영화 활동이 평생 금지되는 법정선고를 받았다. 나치 부역자라는 의심이 풀린 것은 1947년, 유태인을 제작사 직원으로 숨겨 나치로부터 구출한 공로가 뒤늦게 입증되면서 그의 활동금지령과 <까마귀>의 상영금지 조치는 해제됐다.

오늘날 <까마귀>는 ‘검은 다이몬드’로 비유한다. 나치의 ‘콜라보’라는 당대 최고의 오명을 뒤집어썼던 작품이 왜 제7의 예술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재평가 받았는지, 타임머신을 타고 ‘까마귀’의 세상으로 떠나보기로 한다. 

 

 

▶ 익명의 밀고자

 

<까마귀>의 배경무대는 프랑스의 평범한 시골도시 생-로뱅(Saint-Robin). ‘까마귀(Le corbeau)’로 서명한 익명의 편지가 등장하면서 평화롭던 마을은 혼돈과 소요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익명의 편지는 독신인 제르멩 의사가 지역유지 보르제 박사의 부인과 불륜관계이며, 낙태시술을 자행한다는 심각한 내용이 담겨있다.

‘까마귀’의 타깃은 제르멩 의사이지만, 곧 이어 다른 유지와 주민들에게도 험담, 중상모략, 밀고를 담은 ‘까마귀’가 날아들기 시작한다. ‘까마귀’라는 익명성을 차용한 주민들이 생겨나, 평소 원한 감정을 지닌 다른 주민들을 고발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제르멩 의사의 환자가 ‘까마귀’의 편지를 받고 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을 날이 임박했다는 통보였다. 

생-로뱅은 ‘까마귀’의 정체를 찾아내려는 마녀사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주민 모두가 모두를 의심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제르멩 의사는 자신마저 ‘까마귀’로 오인 받자 앙케트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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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 튈에서 생긴 일

 

<까마귀>는 1917년에서 1922년에 걸쳐 코레쥬 지방 튈(Tulle)에서 생긴 실화에서 착상된 작품이다. 1917년 12월 ‘호랑이 눈’으로 서명한 우편물이 튈 경시청에 배달된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경시청 간부 쟝-바티스트 무리의 사생활을 밀고하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안젤 라발이라는 숨겨진 여인이 있고, 이들 사이에 사생아가 있다는 것이다. 

익명의 편지는 빨래바구니, 도로, 성당 곳곳에 삐라처럼 뿌려졌다. 이들 중 일부는 주민들의 간통, 불법행각을 밀고하는 내용도 끼어있었다. 이런 와중에 법정재판 기록관이 익명의 편지를 받고 충격 받아, 실성하여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경찰이 조사에 나섰고, 프랑스 전국에서 취재기자들이 튈로 몰려 들었다. 

1922년 1월, 필체 감정가의 입회하에 혐의대상 주민들의 받아쓰기 필체 검증이 실시됐다. 받아쓰기는 오랜 시간 지속됐다. 지칠 때까지 쓰다보면 글씨체를 변조할 수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까마귀>에서도 보르제 박사의 주관으로 주민들이 학교에 모여 하루 종일 지칠 때까지 받아쓰기를 하는 황당한 장면이 나온다. 

튈의 필체 검증에서 쟝-밥티스트 무리를 타깃삼아 헛소문을 퍼트렸던 ‘호랑이 눈’의 정체가 밝혀졌다. 안젤 라발이었다. 결혼을 못하고 홀어머니와 살아가던 34살 노처녀였다. 초라한 노처녀의 빗나간 짝사랑이 튈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왜소한 몸집의 안젤 라발은 법정에서 늘 검은 옷차림으로 잔뜩 웅크린 자세였는데, 당시 취재기자들 눈에는 까마귀의 형상으로 비춰졌다고 한다. 

 

▶ 까마귀 대 괴벨스

 

100년 전의 일이다.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 중상모략, 허위사실을 유포시키는 도구로 익명의 편지들이 사용되던 시대였다. 불어로 익명의 밀고자를 ‘까마귀’로 표현한다. 영화 <까마귀> 이후 생긴 표현이다. 

튈의 스캔들을 시나리오로 작성한 ‘뱀의 눈’이 1932년 등장했지만, 어느 시네아스트도 감히 영화 작업을 하겠노라고 나서지는 못했다. 당대 사회정서, 도덕적 가치관과는 전혀 코드가 맞지 않는 각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까마귀>는 프랑스 영화가 나치의 시퍼런 사전 검열을 거쳐야했던 독일 강점기에 탄생한다. 콘티넨털 필름이라는 독일 제작사가 투자한 영화였다. <까마귀>가 나치부역 작품이라고 의심을 받은 배경에는, 영화나 콘서트 등 문화예술을 통한 선동과 조작으로 히틀러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줬던 괴벨스의 그림자도 간과되지 않는다. <까마귀>에서 그려진 프랑스는 한낱 비겁하고 음흉한자들, 밀고자들의 나라에 불과했던 것이다. 

1947년 상영금지 조치가 해제되고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패러독스적인 해석도 흘러나왔다. 제7의 예술성에 절묘하게 녹아있는 반 나치정신을 나치가 눈치채지 못하고 투자했다는 해석이다.

클루조는 ‘뱀의 눈’ 각본을 직접 수정했고, 당대 사회, 정치 분위기를 초월하여 히치콕과 어깨를 겨루는 미스터리 서스펜스를 가미했다. ‘까마귀’ 수법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해학, 유머도 곁들여진다. 괴벨스가 뻔뻔한 거짓말 선동에도 쉽사리 넘어가는 군중심리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까마귀’ 수법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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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도의 미스터리 연출 기법 

 

<까마귀>의 오프닝시퀀스는 평범한 시골도시의 평온한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며, 태풍전야의 써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머지않아 평화로운 마을은 마녀사냥에 흥분한 집단 히스테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까마귀’로 판정받은 마리 코르벵 간호사가 군중들로부터 쫒기는 장면은 가히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녀가 텅빈 골목을 혼자 달리는 장면에서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군중들이 빠른 속도로 추적해오고 있음을 관객들은 느낄 수 있다. 

간호사가 느끼는 공포심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스릴이 넘치는 장면이다. 공포에 질린 여인의 표정을 지켜보자면 ‘까마귀’가 아니라는 것을 추리해낼 수 있다. 그녀는 집단 린치를 피해 방으로 간신히 도피한 후 깨진 거울을 통해 얼굴을 들여다본다. 클루조는 등장인물의 내적동요를 관객도 함께 느끼도록 하는 고도의 미스터리 연출기법을 도입했다.  

 

▶ 모더니즘

 

일, 가족, 애국심이 중요한 가치관으로 부각되던 시대에 생-로뱅 주민들에게는 어떠한 영웅적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거꾸로 동시대인 모두가 감추고 싶고, 언급하고 싶지 않은 치부와 금기들을 과감하게 노출시킨다. 

‘까마귀’의 날갯짓이 극성을 부릴수록, 겉모습과 체면을 중요시 여기는 유지들의 위선과 비겁함, 음흉한 민낯도 서서히 드러난다. 오늘날에도 사회 이슈로 떠오르는 낙태, 불륜, 마약, 집단폭력 등을 과감하게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퇴색되지 않는 모더니즘이 가미된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눈요깃거리도 가미된다. 여주인공 드니즈가 제르멩 의사를 유혹하기 위해 꾀병부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이다. 당대에 물의를 일으켰던 에로틱한 장면이다. 가슴의 풍만함을 돋보이려고 베개를 어깨 밑에 넣고 촬영한 기법, 진하고 두터운 입술 화장법으로 여인의 퇴폐적인 관능미를 한층 부각시켰다. 

크루즈는 밀고와 고발, 조작과 속임수, 쑥덕공론, 마녀사냥 등 한 사회가 지니는 모든 색채를, 흑백 명암의 뉘앙스가 교차되는 연출기법으로 표현했다. 

 

▶ 흑과 백 명암의 뉘앙스

 

<까마귀>에는 선과 악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악한 자와 착한 자의 구분도 없다. 전등불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느냐에 흑백 명암이 교차되듯, 인간이 설정한 선과 악의 축에도 뉘앙스가 깔린다. 

천장 램프를 사이에 두고 제르멩 의사와 보르제 노장 박사가 대치하는 장면은 <까마귀>의 가장 상징적인 시퀀스이다. 두 사람은 ‘까마귀’의 정체를 쫒는 의사 동료이면서, 젊고 아름다운 보르제 부인을 사이에 둔 연적관계이다. 전반적 흐름으로 보아 제르멩 의사는 ‘선’을, 보르제 박사는 ‘악’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까마귀’가 퍼트린 중상모략을 믿는 이들에게 제르멩은 악의 축, 보르제는 선의 축으로 기울어진다. 

이렇듯 클루조는 흔들리는 램프 전등불에 의하여 교차되는 흑백 명암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선악 개념을 명백하게 구분 지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100% 선한 자도, 100% 악한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결백하지 않다.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숨기고 싶은 비밀이나 결점, 치부를 지닌다. 제르멩 의사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도 밝히기를 꺼려하는 아픈 과거가 있다. 보르제 박사의 경우 지성과 명성 뒤에 늙은 여우같은 교활함을 감추고 있다. 아름다운 글래머 여인 드니즈로 말할 것 같으면, 놀랍게도 절름발이 불구이다. 

<까마귀>는 클루조의 뛰어난 흑백명암 연출기법, 고품격 대본, 배우들의 연기력이 삼위일체를 이룬 명작으로 간주한다. 카리스마적인 제르멩 의사 역을 맡은 피에르 프레네(Fresnay, 1897-1975년)는 중후한 연기력으로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은 배우였다. 그러나 <까마귀>로 인해 옥살이를 겪어야했는데, 여주인공 드니즈 역의 지네트 르클레르(1912-1992년)도 무거운 옥고를 치러야했다.    

당대 프랑스는 나치독일에서 해방되자 ‘콜라보’를 색출하려는 편집광적 의심과 고발이 난무했었다. 영화 속 생-로뱅 주민들의 집단 히스테리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결국 생-로뱅이 프랑스를 축약하는 상징성을 지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여, <까마귀>의 생-로뱅은 진실과 거짓이 파노라마처럼 교차하는 한 사회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이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검은 공룡으로 성장한 ‘까마귀’가 지금도 어디선가 날갯짓을 하려,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다. 

 

【프랑스(파리)=한위클리】이병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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