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언론에 등장한 최초의 한국인 김규식…김호열 그리고 양귀념

과거의 고찰을 통해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사진: 호주의 7대 연방총리 윌리암 휴스(1915-1923).  한국인을 처음 만난 연방총리로 추정된다.

 

[편집자 주] “과거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매우 중요하고, 근대사 이후 언론은 승자와 패자를 두루 보듬는 ‘객관적 역사’의 초석을 다져왔다. 

그렇다면 호주 언론에 처음 드러난 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호주 언론이 호주인들에게 소개한 한국의 첫 모습은 어땠을까? 

또한 호주언론에 처음 소개된 한국인은 누구이고 그는 어떤 역사의 흔적을 호주에 남겼을까? 그리고 그 역사의 흔적은 호주한인동포 및 고국 사회에 어떤 교훈을 던져줄까?

호주한인사회의 최고의 역사를 지닌 대표적 한글매체 <톱뉴스>는 광복 74주년을 맞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특집 기획 호주 언론에 처음 드러난 한국’을 2부에 걸쳐 게재한다.

 

제1부에서는 호주 언론이 보도한 한국의 첫 모습을 그리고 제2부에서는 호주 언론에 등장한 최초의 한국인을 소개한다.

 

호주 기독교사에 등장한 김규식과 김호열

지난 1999년 호주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호주가 6.25 전쟁에 호주군을 파병하면서 시작된 한국과 호주의 관계는 혈맹관계이다”라고 말했다.

호주 내의 역사 및 이민학자 그리고 호주한인사회의 지식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월남전 종전이 실질적인 호주한국이민역사의 출발점이다”라는 견해를 보여왔다.

호주정부 역시 “월남전 종전과 함께 본격적인 한인 이민이 이뤄졌지만 훨씬 그 이전부터 선교사 등을 통한 호주와 한국 간의 인적교류가 이뤄졌다”고 기술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1995년 이민부가 공식 발표한 ‘호주한인지역사회 현황’ 자료에 공식 기록돼 있다.   

 

이 자료집은 당시 이민장관이었던 닉 볼커스 연방상원의원(노동당)이 20세기 말까지 호주 한인촌 명성을 지켰던 시드니 캠시에서의 출간식을 통해 호주사회에 발표됐다.

실제로 호주 땅을 처음 밟은 한인관련 자료는 기독교 서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윌리엄 휴스 연방총리 예방”

한인 1.5세대 출신 목회자 양명득 목사가 번역해 출간한 <호주장로교 한국 선교역사 1889-1941>에 한국인의 호주 첫 도착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고 그 내용의 일부는 호주한인이민 50년 사에도 전재돼 있다.

이 책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한국에서 직접 선교활동을 했던 에디스 커(Edith Kerr) 선교사와 조지 앤더슨 선교사의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두 선교사는 호주의 가장 대표적인 한국 기독교사 전문가로 평가 받고 있다.  

그렇다면 에디스 커 선교사와 조지 앤더슨 선교사가 목격한 호주의 첫 한국인은 누구일까?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신원이 확인된 첫 방문자는 놀랍게도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한 김규식이었다.

미국, 프랑스 등 세계 곳곳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위한 ‘사실상의 공공외교활동’을 펼쳤던 김규식은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호주에 도착했다.

그는 호주에서 정치인들과 다각적인 접촉을 벌였고, 그해 10월 3일 윌리엄 휴스 연방총리를 예방해 한국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고 이 책자는 기술했다.

아쉽게도 본지 취재진은 김규식 선생의 윌리엄 휴스 연방총리 면담과 관련된 언론 자료를 발굴하지 못했다.

아무튼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단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호주땅을 밟은 첫 한국인은 김규식이다.

 

호주선교사 설립 창신학교 교사 출신 김호열의 호주 도착

하지만 호주 빅토리아 주 장로교단의 자료에 따르면 김규식 선생에 앞서 소수의 미주 한인 이민자들이 사업차 호주땅을 밟은 것으로 추정됐으나 이들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호주 방문 일정을 마친 김규식은 같은 해 12월 22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거쳐 난징호(南京號)를 타고 상하이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김규식 선생의 뒤를 이어 호주 땅을 밟은 두번째 한인 역시 빅토리아 주 장로교단의 도움으로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호주장로교 한국 선교역사 1889-1941>에 기록돼 있다.

호주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창신학교 교사였던 김호열은 퀸슬랜드 주 목요섬(Thursday Island)을 통해 1921년 9월 6일 호주 멜버른에 도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빅토리아 주 장로교회의 지원으로 멜버른 대학교에서 영어 공부에 전념했으나 병으로 다음해 5월 한국으로 귀국했고 얼마 안 돼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호열의 호주 도착 소식은 김봉현 전 주호한국대사가 한국의 한 매체에 기고한 바 있고, 호주한인이민 50년사에도 기록돼 있다.

안타깝게도 김호열에 관한 호주언론의 보도 내용 역시 찾을 수 없었다.  

 

 “100년 전 호주땅을 밟은 영롱한 한국 여성”

호주 언론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한국인은 한국에서 양한나로 알려진 양귀념이다.

멜버른에서 1846년부터 1957년까지 발행했던 일간지 <디 아거스, The Argus>는  양귀념의 호주 도착 소식을 기사화한데이어, 1927년 7월 29일자 신문에는 그와의 심층 인터뷰 기사가 게재됐다.

당시 <디 에이지>와 경쟁했던 유력 일간지 <디 아거스>는 양귀념과의 인터뷰를 통해 호주와 한국 사회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봤다.

양귀념은 1893년 한국의 초대 기독교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으며, 호주선교사가 설립한 부산진 일신여학교의 1회 졸업생이다.

마산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본으로 건너 가 요코하마 신학대학에서 유학했다.  

3.1 운동 직후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의정원 대의원을 지내며 자금조달 역할을 했다”라고 한국의 사료에 기록돼 있다.   

양귀념은 1922년 임시정부 특사로 밀입국하던 중 붙잡혀 옥살이를 했으나 석방된 후 다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때 도산 안창호가 '백두에서 한라까지 내 나라를 길이 보전하도록 노력하라’는 뜻으로 양한나라는 새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알려진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양귀념의 새 이름 양한나

‘양한나’라는 새 이름을 얻은 그는 192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1926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호주 선교사 에이미 스키너(Amy Skinner)씨와 함께 호주 땅을 밟았다.

양귀념을 “애국심이 불타는 영롱한 한국여성이다”라고 묘사한 <디 아거스>는 “양귀념은 1926년 호주 땅에 발을 내딛고 서양 문화권에서 서양 교육을 접한 최초의  한인 여성이다”라고 소개했다.

양귀념은 <디 아거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과 꿈, 호주에서의 유아 교육 공부에 대한 열정 등을 자신감 있게 드러냈다.

두터운 영어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제 강점기의 조국을 향한 뜨거운 애국심을 충분히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그는 한국 여성으로서의 긍지와 함께 교육의 중요성과 열정을 지닌 선구적 여성이었던 것으로 비쳤다.

실제로 호주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여러 유치원을 방문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직업학교 강의에도 적극 참석하면서 “교육만이 독립의 희망을 안겨줄 수 있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교육이 독립을 안겨줄 것”…유치원 교육의 중요성 역설

그는 “우리 조국의 장래는 아이들에게 달려있고 이 때문에 유아교육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유치원을 설립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5분이면 500명 가량의 유치원 원생들을 모을 수 있어요. 집도 없고, 학교도 없고…길에 버려진 고아들..."이라며 당시 한국의 상황을 전했다.

그는 또 “유치원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부모들을 유아교육의 현장으으로 이끌어내고, 가정 교육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역시 처음에는 호주 식 교육 방식에 문화적 충격을 겪었다.

“선교사님들이 처음 한국에 고아원을 열었을 때, 아이들과 자유롭게 노는 것에 대해 얘기하시더군요”

“저는 한국에서 교육의 최첨단을 달리는 학생이었지만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일 뿐이고, 어른들이 뭘 해야할 지 말하고 보여주면, 아이들은 그걸 따라하는 게 맞는것으로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호주에 와서 ‘자유롭게 논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됐죠.  호주의 아이들은 한국의 아이들보다 훨씬 행복해 보이더군요”라고 말했다.

그가 발견한 어른과 아이들의 대화의 가장 대표적 차이점은 명령과 부탁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할 때 ‘저 것 가져와.  이것 해라’투인데 반해 호주에서는 ‘가져다 줄 수 있겠니, 도와줄 수 있겠니’ 등 늘 존중체였다”고 지적했다.

 

한국식 명령체 어법호주식 존중체 어법

이런 맥락에서 그는 “그래서 호주의 아이들이 더 자기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의 주인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에 눈에 비친 부모와 자식간의 평등 관계에 대해서는 “한국에 수입돼서는 안될 것 같다”면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한 것으로 이 신문은 기록했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양귀념의 호주 예찬론은 이어졌다.

"여러분은 이 아름다운 호주에서 살 수 있다는 게 정말 행운이에요”

“여기선 아무도 배고프거나 목 마르지도 않고, 추위에 방치 되거나, 음식을 훔쳐야만 하는 아이들도 없고, 오갈데가 없어서 길에서 얼어 죽는 노인들도 없고, 책을 겨드랑이 밑에 끼고 학교 문 밖에 서 있어야 하는 아이들도 없고,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고아들도 없고요…”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일할 수 있는 광활한 땅에 넓은 농장도 있고, 정말 운이 좋지 않나요?”

“그리고 또 정말 행운인 건, 호주는 다른 나라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예요”

“다른 주변국가가 우리나라의 작은 것 하나까지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는 그 고통을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라는 말도 남겼다.

당시 양귀념과 <디 아거스>의 취재진은 “그는 뜨거운 애국심과 더불어 눈부신 영혼을 가진 한국여성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취재진은 “물론 언어 장벽으로 인해 인터뷰가 수월하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는 말도 남겼다.

한국으로 돌아간 양 씨는 아동 교육과 여성 권익 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1936년에는 부산 YWCA를 창설했다.

광복 다음해인 1946년에는 초대 수도 여자경찰서장에 취임했고, 이후 고아원 및 정신병원을 설립하는 등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 평생을 헌신했다.

197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으나 그 해 유명을 달리했다.

©톱 미디어 특별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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