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뉴스로=노창현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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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는 서울역에 있었습니다. 약 20만명의 학생들과 젊은 시민들은 서울역에서 남대문을 지나 광화문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남대문에 이미 수만명의 전투경찰이 포진하고 있었지요.

 

1980년 5월 15일. 그날은 일요일, 스승의 날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역 광장에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압살(壓殺) 하려는 전두환신군부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비상계엄 해제와 조기 개헌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1979년 10월26일 유신의 심장이 멎은 이래 국민들은 이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세상이 열리리라 믿었습니다. 18년전 박정희소장의 쿠데타로 소생하던 민주주의가 사그라진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정치권과 대학가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논의를 신중하게 진행하였지요. 그러나 그해 12월12일 박정희가 빙의한 것일까요. 육군소장 전두환(全斗煥)과 노태우(盧泰愚) 등 군부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또다시 하극상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셀프임명돼 정보 기관을 장악했습니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서울의 대학가는 신군부 세력의 음모를 감지하고 비상계엄 철폐와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 시위에 나섰습니다.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를 비롯한 정치 현안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남대문은 시위대와 전경들이 대치하는 한 가운데 섬처럼 위태롭게 서 있었습니다. 긴장이 최고도에 오를 무렵, 돌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흥분한 한 청년이 남대문 바로 옆에 있던 텅빈 버스에 올라타 그대로 몰고 전투경찰들을 향해 돌진한 것입니다.

 

그순간 시위대에선 ‘안돼’ 하는 비명이 나왔습니다. 그 때문에 꽃다운 나이의 전경 한명이 숨을 거뒀습니다. 폭력시위는 결단코 하지 않았던 시위대였습니다. 그 청년의 잘못된 행동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어쩌면 그것이 지휘부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폭력시위를 유도하는 것으로 본 지휘부는 시위가 과격해지면 폭력적인 상황으로 희생자가 더 나올 수 있다고 판단했겠지요. 이른바 서울역 회군(回軍)이 결정된 배경입니다. 그러나 왜 지휘부까지 해산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신군부는 애초부터 권력 찬탈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5월 10일 중앙정보부는 ‘북괴남침설’을 흘렸습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전두환 등 신군부가 권력찬탈을 위해 북한의 남침설을 유포하고 있다”고 보고한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지요.

 

최규하 대행을 밀어내고 군부가 전면에 나서려면 적잖은 인명이 희생되는 극도의 혼란상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서울의 시위대 지휘부가 해산된 틈을 이용해 전두환 신군부는 최규하 대행에 압력을 넣어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정치활동 금지령과 휴교령, 언론 보도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리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포함한 정치인을 연행하고 재야인사 수천 명을 감금하고 군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습니다. 12.12에 이은 제2의 군사쿠데타였습니다. 20일 열릴 예정이었던 임시 국회가 무산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권력 찬탈 조직이 본격 가동됐습니다.

 

서울에서 시위의 동력이 급격히 사라졌지만 빛고을 광주에서는 더큰 분노의 함성이 일어났습니다. 비상계엄 해제와 신군부 세력 퇴진, 김대중 석방, 민주주의 실현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일어났지요. 하지만 신군부는 공수 부대를 동원하여 학생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이 국민을 무참하게 살상하는 초유의 참극(慘劇)이 일어난 것입니다.

 

신군부는 79년 부산 마산 민주항쟁 때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하고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했습니다. 이미 저들은 3월부터 공수부대에 시위진압을 위한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이동 배치하는 등 시위대를 진압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북한의 위협에서 조국을 지키라는 군을 빼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들을 살상하는 자가 우리 군의 수괴(首魁)였던 것입니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했습니다. 신군부는 이날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을 투입,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습니다.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한 것입니다.

 

광주시민들은 분노했고 목숨을 건 항전을 시작했습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중장년까지 시민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20일 시위대는 20만 명이 넘었고 택시와 시내, 시외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습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을 방화했고 20일 자정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습니다.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21일 오후 1시경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하는 만행(蠻行)을 저질렀습니다.

 

이날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주시, 화순군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한 것입니다.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습니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습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고,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며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뒤집어 씌웠지요.

 

계엄군은 광주 봉쇄작전에 들어갔습니다. 21일 오후 9시30분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고, 실탄이 분배되었습니다. 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면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이 자행된 것입니다. 5월 24일에는 계엄군 간 2차례 오인 교전(交戰)이 일어나 13명이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22일 이후 광주는 완전 봉쇄됐고 전국에는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가 이때부터 떠돌았습니다. 광주는 고립됐지만 시민들은 놀라울이만큼 침착하게 자치질서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고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섰습니다.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등 광주항쟁 기간 동안 시민들은 최고 수준의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상점들이나 금융기관, 백화점에서도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습니다. 끔찍한 비극속에서도 질서와 도덕성을 발휘하는 광주는 외국 미디어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평화시위는 계속됐고 시민들은 ‘애국가’와 ‘울밑에선 봉선화’를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했습니다. 전두환은 군대를 빼내 시민을 살상했지만 광주시민들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로 나라의 안보도 지켰습니다. 이런 광주에 북한 특수권이 침투해 양민을 학살하고 혼란을 부추겼다고 우기는 수꼴세력들은 얼마나 한심한가요.

 

전두환 신군부는 끝까지 악마적 선택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5월 27일 새벽 2시 2만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습니다.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이날 아침, 전남도청에서 무려 1만여 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습니다. 그렇게 도청은 점령되었고 열흘간의 광주항쟁은 비극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은 5월 17일부터 27일까지 날짜별 상세 일지입니다.

 

5월 17일 토요일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22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24시 00분: 5월 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신군부 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대학교 휴교령 선포. 주요 도시의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 전북대 농학과 2년인 이세종(당시 21세)은 5월 17일 12시께 계엄군에 쫓기다 전북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추락사).[44]

 

5월 18일 일요일01~02시 경: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가 김대중 등 재야 인사와 김종필 등 공화당 지도자를 체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 국회 기능 마비됨.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 학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10시 00분: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를 향해 투석을 시작.

10시 15분: 학생들이 던진 돌에 부상자가 발생한 데에 분개한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의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계엄군측, 시민측 첫 번째 부상자 발생)[22]

10시 20분: 일부 학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광주 금남로로 이동함.

11시 00분: 전남대 300여 명 가톨릭 회관 집결,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시킴.

12시 00분: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옴.

15시 40분: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구타 및 현장 체포함.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청각장애인인 김경철이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 당함.

19시 02분: 계엄사령부, 통행금지령 확대 국내외 방송을 통해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함.

20시 00분: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불안, 흥분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동조.

21시 00분: 계엄사령부 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해산 경고문 발표함.

 

5월 19일 월요일03시 00분: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청각장애인 김경철 병원에서 사망 - 두 번째 희생자).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위력 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진입, 대검으로 인한 자상자 발생.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14시 40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돼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15시 00분: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16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20시 00분: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침.

 

5월 20일 화요일08시 00분: 고등학생들의 참여에 자극받은 정부는 문교부를 통해 광주 시내 및 광산군, 나주군 일대 고등학교에 휴교 조치 하달.

10시 20분: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끌려나와 마구잡이 구타 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20시 0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 및 공수부대원의 진입을 가로막음.

20시 10분: 시위대, 도청으로 서서히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택시와 차량에 가로막힌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함.

20시 00분: 3공수, 11공수 여단장 실탄 분배 지시 (3공수여단장 실탄 장착 지시, 11공수의 경우 61대대, 62대대가 각각 1,000여발씩 분배)

21시 00분: 택시 200여 대와 버스들은 진입로를 차단, 공수부대 및 경찰과 충돌. 일부는 우회해서 감.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 MBC 건물 방화.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사망. 시민 수십 명 부상.

 

5월 21일 수요일0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 계엄군 측 부상자 5명으로 보고됨.

0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0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함.

04시 30분: 광주 KBS 건물 방화.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함.

10시 00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탈취해 광주시 내로 몰고들어옴.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함.

12시 10분: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위대가 전남대 앞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 km 후퇴. 공수부대의 진압 도중 시민 4명 사망함.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시작.

14시 00분: 시위대가 나주시, 화순군 등지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 시작.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을 종용하는 설득 방송.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16시 00분: 화순군, 나주군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17시 30분: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광주 시내가 계엄군에 의해 고립됨.

0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라는 내용의 전단 살포.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 항의 수습안 전달.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18시 00분: 20사단이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 km 전진하며 사격, 작전 중 지역 주민 8명 사망.

19시 00분: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 보도.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0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함.

10시 15분: 수습위 무기회수반을 조직해 총기 회수 작업 시작.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13시 20분: 11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4명 사망.

14시 20분: 송암동에서 11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9명 사망 40여명 부상,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 처형.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11시 00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됨.

 

5월 27일 화요일02시 00분: 계엄군의 광주시 진입.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함.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05시 00분: 시민군 생존자들 자진해서 자수. 자수 과정에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 3명을 시민군이 자진해서 체포해 계엄군과 경찰에게 넘겼음.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게 도청 인계.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자료 출처 위키피디아>

 

광주를 10일간 연옥으로 만든 신군부의 만행으로 사망자 163명, 행방불명자 166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약 4천여명 등 총 5,189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1988년 7월, 국회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 제출된 국방부 답변자료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사망자 가운데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8명이나 됐고 가장 나이 어린 사망자는 4세 가량의 남자 어린이로 1980년 5월 27일 목에 관통상을 입어 숨졌습니다.,

 

13일 뉴저지 포트리에서 열린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강준화 미동부민주포럼 대표는 “5·18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상당수 생존자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우울증과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보이며 현재까지도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2007년 8월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5·18 피해자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에 달합니다.

 

광주는 정권찬탈 시나리오를 위한 전두환 신군부의 참혹한 희생양(犧牲羊)이었습니다. 그런 광주의 희생이 있었기에 살아남은 우리들은 광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위대한 촛불시민의 명예혁명을 이뤘고 자유와 민주, 인권의 새 나라를 꿈 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모든 영령들이시여. 이 나라와 민족을 끝까지 지켜주소서.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노창현의 뉴욕편지’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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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로=이계선작가     전쟁이 끝나자 논공행상이 벌어졌다. 반란군은 출세하고 진압군은 축출됐다. 12.12이후 대한민국의 군수뇌부는 이렇게 바뀌었다.   국방부장관 주영복, 육참총장 이회성, 육참차장 황영시, 수경사령관 노태우, 1군사령관 윤성민, 2군사령관 차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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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화 참군인 김오랑 소령 file

    김재규복권소설 절찬연재   뉴스로=이계선 작가     설복에 실패한 최세창은 돌아가 전투준비를 지시했다. 공격에 앞서 전화로 적전(敵前)을 분열시켰다. 같은 특전사라서 이편저편 서로 잘 아는 친구와 동료 사이였다. 최세창의 부하들은 설득전화를 걸었다.   “이미 싸...

    37화 참군인 김오랑 소령
  •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일 수 있다" file

      자동차 사고에서 배운 교훈 (로스앤젤레스=코리아위클리) 홍병식(내셔널 유니버시티 교수) = 저는 최근에 자동차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자동차는 폐차 처리 되었으므로 사소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안전벨트와 에어백 덕분으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왼쪽 앞 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일 수 있다"
  • '의식화의 원흉' 리영희 기자의 필화 세 가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안 준비” 보도에 ‘빨갱이’로 몰아 [필화 70년: 30회]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기자 필화 세 가지   ▲ 고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1980년 1월9일 광주교도소에서 2년 복역 후 만기출소하면서 부인과 포옹하고 있다. 리 전 교수는 박정희 정권 시...

    '의식화의 원흉' 리영희 기자의 필화 세 가지
  • 한미동맹? 미국은 아직도 ‘점령군’

    한국민들 힘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만들어야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미국의 석학 노암 촘스키 교수와 함께 정의와 양심을 실천하고 있는 캐나다의 미셸 초스도브스키 교수(71. 오타와대 명예교수)가 3년 전, 서울에서 열린 ‘정전 69년 한반도 평화협...

    한미동맹? 미국은 아직도 ‘점령군’
  • ‘문빠’가 되어볼까요? file

    멋진, 이쁜 문재인     김명곤     문재인 정말 멋져요 하는 짓마다 이뻐요 일할 사람들, 국민의 가슴으로 뽑는 것 같아요 멋진 사람들, 쏙쏙 뽑아다 쓰는 문재인은 새 대한민국호 최고의 건축사, 정말 이뻐요   김이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 만한 판관이 있었나요?...

    ‘문빠’가 되어볼까요?
  • 문재인정부 북한특사 보내야 file

    외교주도권 위해 남북대화 시급     뉴스로=이재봉 칼럼니스트     문재인 정부 출범에 기대가 크다. 평화와 통일이 한 발짝이라도 앞서 정착되고 하루라도 앞당겨질 것 같다. 꽉 막힌 남북관계가 뚫릴 것 같고 잔뜩 꼬인 한중관계가 풀릴 것 같다.   세 가지 걸림돌을 ...

    문재인정부 북한특사 보내야
  • "천년이 하루같은 날" file

    5.18 기념식을 보고 나서   김명곤     미국땅 행복한 밤입니다. 모든 날들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골방에서 울다가 박수치다가 아내에게 틀켰습니다. 이거 무슨 시추에이션?   문재인 이 분, 참 섹시한 남자입니다.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5.18 이걸 온 몸으...

    "천년이 하루같은 날"
  • ‘포스트 트럼프’를 대비하라 file

    펜스부통령과의 네트워크 구축해야       뉴스로=노창현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미대선 전에 트럼프 당선은 물론이고 트럼프 탄핵까지 예언(?)했다면 나중에 돗자리 깔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요. 지난해 11월 8일 ‘트럼프가 한국에 기회다-미대선을 보는 또다른...

    ‘포스트 트럼프’를 대비하라
  • LA소녀상 中위안부피해할머니 추모제 file

    가주한미포럼 주관     한국에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한반도 주변 정세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일본의 아베총리와의 첫 통화에서 '한일 합의' 준수를 요구하는 아베 총리에게 "한일 합의는 대다수 국민이 정서상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LA소녀상 中위안부피해할머니 추모제
  • 36화 특전사의 아버지 정병주장군 file

    김재규복권소설 연재   뉴스로=이계선작가     진압군측은 전의를 잃고 있었다. 본부를 장태완의 수경사령부로 옮겼지만 손을 놓고 있었다. 장태완 혼자서 용전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력동원을 하지 않기로 한 신사협정에 속아있는 육본수뇌부의 반대가 있어 힘을 쓸...

    36화 특전사의 아버지 정병주장군
  • 35화 반란군의 반전묘수 file

    넋놓은 진압군..장태완만 고군분투   뉴스로=이계선 작가     한편 경복궁 반란군측은 공포에 휩싸여 버렸다. 육본측이 이렇게 재빨리 반격해올줄은 몰랐다. 자기들이 최규하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내지 못해 허둥거리는 사이에 번개처럼 반격작전계획을 완료해 놓은 것이...

    35화 반란군의 반전묘수
  • 우리는 5.18영령들에 빚을 졌습니다 file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뉴스로=노창현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그날 저는 서울역에 있었습니다. 약 20만명의 학생들과 젊은 시민들은 서울역에서 남대문을 지나 광화문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남대문에 이미 수만명의 전투경찰이 포진하고 있었...

    우리는 5.18영령들에 빚을 졌습니다
  • 어버이연합과 김동길 file

    "당신들이 부끄럽다"   뉴스로=김중산 칼럼니스트     김동길씨(연세대 명예교수)가 11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문재인에게 바란다”는 제하의 글에서 “앞으로 죽고 싶은 고비가 많을 것”이라며, “(하지만) 임기가 끝나도 절대 자살하지 말라”고 당부해 논란이 일고 있...

    어버이연합과 김동길
  • 삐딱해서 미안해 file

    총리후보 아들병역면제에 관하여   뉴스로=소곤이 칼럼니스트     문재인정부의 첫 번째 시험대는 이낙연 총리후보다. 국회의원 4선에 전남도지사 재선의 경력에 비춰 그의 능력과 경륜은 의심할 바가 없다. 인사청문회에서 도마에 오를만한 문제들은 상속재산 지각신고...

    삐딱해서 미안해
  • 34화 하나회는 박정희의 십상시 file

    위기에 빠진 전두환   뉴스로=이계선 작가     정승화 부인 신윤경은 정신이 몽롱했다. 꿈이 아닌 걸 확인하자 전화를 찾았다. 침입자들이 전화선을 끊어놓아 없었다. 다행히 비밀직통전화가 남아있었다. 직통전화로 노재현국방장관을 불렀다. 노재현은 도망 다니느라 전...

    34화 하나회는 박정희의 십상시
  • 33화 “참모총장을 체포하라!” file

    끌려가는 당나귀   뉴스로=이계선 작가     “노재현을 잡아 대통령집무실인 삼청동공관으로 끌고 와라“   하나회에 비상이 걸렸다. 노재현국방장관을 찾으러 한남동으로 달려갔다. 노재현은 없었다. 노재현이 살고 있는 국방장관 공관은 정승화총장이 사는 참모총장공관...

    33화 “참모총장을 체포하라!”
  • "행복한 술타령" file

    "행복한 술타령" 김명곤 문재인-조국-임종석 멋져요. 이 셋만 가지고도 켜켜이 쌓인 적폐 덩어리 뒤엎고도 남겠네. '권력의 개' 검찰은 벌벌 떨고 국정교과서는 폐지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되살아나고 개성공단은 열릴 거고 금강산행 뱃길도 트일 거고 이산가족재회 ...

    "행복한 술타령"
  • 재벌에 의한 필화 1호 : 정경·권언 유착의 심화

    [필화 70년: 29회] ‘3분 폭리’ 연쇄 보도…검찰이 기소한 건 재벌 아닌 언론   ▲ 1966년 9월22일 6대 국회 58회 정기회 본회의 삼성 재벌의 사카린 밀수사건 관련 대정부질문에서 한국독립당 김두한 의원(오른쪽)이 국무위원석을 향해 미리 준비한 오물(왼쪽 아래)을 뿌...

    재벌에 의한 필화 1호 : 정경·권언 유착의 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