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파’로 전향?

 

달리기의 부작용 중 하나는 건강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을 갖기 쉽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공원에서 15km 정도를 달린 지 석 달이 지났다. 전신이 가볍고 걸을 때마다 종아리에 불끈 힘이 느껴졌다. 좋은 일은 함께 나누는 법이라 아내에게도 달리기를 권했다. 음식으로 몸을 보하는 체질인 그녀는 별다른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보약 중에 보약, 미용 중에 미용이 운동인데 도무지 그 맛을 모르는 미개한(?) 위인이다.

 

몇 달 전 겨울을 앞두고 아내가 독감 예방주사를 맞자고 했다. 자존심이 약간 상할 뻔했다. 중년이지만 강도 높은 아침 달리기로 단련된 나를 감기 주사를 맞아야 할 허약자로 보다니 말이다. 차가운 아침 공기 속을 전속력으로 달리면 온몸이 화로처럼 타올라 바이러스쯤은 간단히 태우고도 남을 것이다.

 

“감기는 병이 아니죠. 누가 주사를 맞는다고 그래요? 운동이면 충분해요. 난 해당 사항 없어요”

 

독감 주사를 두고 여섯 식구가 두 파로 갈라졌다. 아내와 딸 그리고 어린 셋째와 넷째는 ‘주사파’가 되어 예방 주사를 맞았다. 반면 한창 육체적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는 스무 살 큰 아들과 나는 당당히 ‘비주사파’를 선언했다. 가정의 무력을 책임지는 두 기둥은 감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드디어 겨울이 왔다. 여기저기서 독감 피해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안타깝지만 나에겐 여전히 강 건너 불이었다. 찬 공기를 마구 호흡하며 달리는 건각과 감기는 그만큼 동떨어진 사이였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큰 아들과 셋째가 캠프를 갔다 오면서 독감이 집으로 침투했다. 두 녀석이 쿨럭거리니 온 집안이 들썩거렸다. 바이스러스가 급속도록 퍼졌으나 ‘주사파’들은 아예 감기에 걸리지 않거나 걸려도 증상이 미미했다. 특히 아내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큰 아들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2주 넘게 격렬한 기침이 계속됐다. 앓아눕지는 않았으나 젊은 기둥 하나가 허무하게 무너진 셈이었다. 하지만 늙은 기둥은 ‘비주사파’ 최후의 보루를 지키며 건재했다. 주사의 효능으로 버티는 아내와 달리 순수한 달리기의 힘만으로 독감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큰 아들의 방에서 증기 기관차가 폭주하는 듯한 기침소리가 들렸다. 몇 주 동안 고생하는 아들이 측은했다. 식구들도 은근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럴 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바이러스 때문에 아들을 멀리한다면 비겁한 일이 아닌가? 계속 기침을 하는 아들의 방에 들어가 침대 옆자리에 쑥 들어가 누었다. 큰맘 먹고 ‘오염지역’으로 들어갔는데 아들이 화들짝 놀랐다.

 

-헉! 왜 이러세요?

-에구 귀여운 넘. 같이 잘까?

-어휴 맘대로 하세요.

 

한 5분 정도 지났나. 아들이 다시 폭음탄 터지듯 기침을 쏟아냈다. 독감 바이러스가 확 번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아들이 좋지만 덜컥 겁이 났다.

 

-잘자.

 

결국 핫바지에서 방귀 빠지듯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안방으로 돌아가 자는데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 독감이 목과 코를 완전히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젯밤 한순간 객기를 못 참고 아들 곁에 누운 탓에 강고한 대항전선이 하룻밤 새 무너진 것이다. 하루 종일 콧물이 줄줄 흐르고 기침소리가 요란해 제대로 업무를 보지 못했다. 밤마다 ‘칙칙폭폭’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면 비틀어진 허스키 목소리로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어마어마한 독감의 위력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독감의 학대 아래 밤낮 고생하는 남편을 보며 ‘주사파’의 우두머리인 아내는 승리의 찬가를 불렀다.

 

“그러게 주사 맞자고 할 때 맞지. 왜 이 고생을 해”

 

천연덕스러운 아내의 표정이 “그러게 전향하라고 할 때 하지”라고 다그치는 고문 기술자가 연상됐다. 내 몸을 무단 점령한 독감은 한 달 가량 강권통치를 하더니 마른 잔기침를 남기고 물러났다. 중년 나이에 병마와 한바탕 드잡이질을 해서인지 노화 속도가 급격해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현저히 늙어가는 얼굴이 처연하고 우울했다. 호되게 아프고 나면 아이들은 크고 어른들은 늙는다는 말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내년부터는 어쩔 수 없이 ‘주사파’로 전향해야 할 것 같다.

 

종합(정동철).jpg

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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