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였나. 그때 한동안 투명인간에 열광했다. 많은 사람이 만화책이나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 봤을 그 투명인간 말이다. 기억 속의 투명인간은 거의 슈퍼 히로에 가깝다. 조국을 위해 악당들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자다.  

 

내가 그려왔던 투명인간은 드라마 속의 인물과 조금 다르다. 어릴 적에는 좀도둑 같은 존재였다. 구멍가게에 가서 물건을 훔치거나 은행에 가서 돈을 슬쩍 빼돌리는 거에 가까웠다.  

 

나이가 들어서는 나쁜 사람들을 혼내 주는데 그 능력을 쓰곤 했다. 부정하게 힘쓰는 사람들에게 겁주는 말을 하거나 대중 앞에서 모욕을 주는 장면을 그렸다. 물론 더 무섭거나 잔혹한 시나리오도 쓰긴 했지만, 대부분은 말도 안되기 때문에 혼자 씩 웃는 경우가 많았다. 

 

뉴질랜드에 온 지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났다. 좋고 나쁜 일도 제법 겪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기한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투명인간이 남의 땅에서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는 투명인간이 되면 여러 가지로 재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나한테 벌어지는데 도통 즐겁지가 않다. 대신에 가슴 맨 밑바닥에서 화가 끓는 소리가 들린다.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큰 키만 빼면, 나는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다. 짤막한 팔과 다리, 그리고 쭉 찢어진 작은 눈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는 거인 또는 단추 구멍이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다. 가끔가다 가는 나를 놀리는 놈 중 한두 명은 패주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는게 너무 싫어서 안 보였으면 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와서도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여기서는 한국에서 당한 경험과 전혀 다르게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다. 가끔가다  ‘나도 있어. 좀 봐줘.’라고 소리를 치고 싶을 때도 있다. 안 봐 준다고 싸울 수도 없는 현실이 슬프다. 어찌 보면 나쁜 관심이 무관심보다 훨씬 낫다는 거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오클랜드에 처음 도착해서는 모든 게 새로워 적응하느라 바빴다. 물론, 소수 민족의 일원이다 보니 당연히 인종 차별은 겪겠거니 하는 상상은 했다. 하지만 내가 투명인간이 되리라고는 생각은 못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현지 사람하고 여러 가지 얘기를 웃어 가며 하는 게 보기 좋았다. 자랑스러운 마음에 그런 자리를 자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얘기했어라고 물어보면 대답이 영 시원하지 않다. 언제부터인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살다 보니까 쇼핑을 해야 할 경우도 많다. 혼자 가면 문제가 없는데 유럽계 백인(파케하)하고 같이 가면 매번 똑같은 경험을 한다. 이런저런 물건이 있냐고 물어보면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 대부분은 파케하에게 대답한다. 돈은 내가 내는데 내 존재는 없다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언짢아진다. 

 

이런 경우는 내가 일하는 곳에서도 때때로 일어난다. 상담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의 행동은 거의 비슷하다. 백인이나 마오리가 옆에 있으면 항상 그들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멋쩍은 기분에 웃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 기분은 더럽다. 동료들하고 얘기할 때 목소리가 커지기도 한다. 나는 투명인간이 아니라고 외쳐본다. 메아리도 없다. 

 

어릴 적에는 투명인간이 되면 좋을 줄만 알았다. 나이가 들어가니 투명인간의 아픈 점도 느끼게 된다. 자식들한테 무시당하는 것도 기분이 나쁜데 인종차별까지 당할 때는 서럽다. 그렇더라도 익숙한 게 편하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본인들이랑 비슷한 사람에게 더 얘기하려 하는 게 이해 가 되긴 한다. 

 

어쩌면 인종차별이 아니고 편안과 안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지에서 오는 편견이나 차별이라도 당하면 아프다. 너무 괴로워서 소리라도 지르려 하면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나도 당해봐서 아는데, 그냥 참아.”라고 위로랍시고 말을 건넨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누가 더 밉다고 나는 이러한 방관자를 싫어한다. 당해 봤으면 참으라 하지 말고 무지와 편견을 대상으로 같이 싸우고 소리쳤으면 좋겠다. 누가 알까. 우리의 작은 목소리가 조그마한 변화를 가져와 다문화 사회에서 인종과 관계없이 다들 더불어 잘 살지.

 

 뉴질랜드 와서 늘어난 게 있다. 여러 가지 색깔의 바지와 셔츠다. 눈에 잘 띄도록 오늘은 오렌지 색깔의 셔츠를 꺼내 입고 상담실로 가야겠다. 하루만이라도 투명인간이 아닌 보이는 인간으로 살아보자고 다짐한다. 오렌지 셔츠, 괜히 웃음이 번진다. 작은 눈이 더 작아지겠다.

 

■ 새움터 회원: 정인화(심리 상담사 / 심리 치료사)

 

*  새움터는 정신 건강의 건전한 이해를 위한 홍보와 교육을 하는 단체입니다.

 

529b4781f3c42979583cfb2cc20382ce_1523342

  • |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 매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file

      Newsroh=장호준 칼럼니스트         잊지 말자고 커네티컷 주립대학 비지팅 센터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Rock Painting 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금년 2018년, 세월호 참사 4 주기에는 눈비가 왔습니다. 바위가 젖어 페인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

    매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 공감 file

    [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남편이 5년 동안 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에게 딸 둘과 막내인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집사님은 호프집을 운영하여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공감
  • 악한사람의 소득엔 걱정이 따른다 file

    사순절 이야기     Newsroh=장호준 칼럼니스트     잠언 15:6 <바른 사람의 집안에는 재물이 쌓이고, 악한 사람의 소득에는 걱정이 따른다.>   고백하건데 어려서 도둑질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나 중학교 저학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동네 가게...

    악한사람의 소득엔 걱정이 따른다
  • 청천벽력..일할수 없다구요? file

    프라임 오리엔테이션 사흘째   Newsroh=황길재 칼럼니스트         생각지도 못한 암초(暗礁)를 만나 쫓겨날 뻔 했다.   원래는 오전에 메디컬 카드를 가지고 DMV에 가서 미주리 면허증과 퍼밋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닥터 오피스로 가보라는 것이다. 갔더니 나보고 집으...

    청천벽력..일할수 없다구요?
  • 미국 기업 12%, 비밀고객제도 실시

    호텔, 소매점, 식당, 항공회사, 은행 등이 주로 이용 (로스앤젤레스=코리아위클리) 홍병식(내셔널유니버시티 교수) = 최근에 저는 패스트 푸드 사업체를 세 개나 소유하고 경영하는 업주로부터 흔히 듣는 고충을 들었습니다. 히스페닉계 종업원을 채용하여 영업을 하는 ...

    미국 기업 12%, 비밀고객제도 실시
  • 전공선택과 직업(2) - 수의학과

    [교육칼럼] 학부 졸업 후 4년제 수의학 학교 마쳐야 (워싱턴=코리아위클리) 엔젤라 김 = 미국에서 수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준비해야할까. 미국에는 미국 수의학 협회(American Veterinary Medical Association)에서 인가한 수의과 대학교가 30개가 있다. 수의과 ...

    전공선택과 직업(2) - 수의학과
  • 트럼프 세법 개정 이후의 유산세와 증여세 file

    【세법 상담】트럼프 세법 개정 이후의 유산세와 증여세 유산세 및 상속세 없는 플로리다, 연방 유산세는 납부해야 (올랜도=코리아위클리) = 위일선 변호사(본보 법률자문) = 지난 해 말 의회를 통과해 올 1월 1일에 발효된 "감세 및 일자리 특별법" (이하 "특별법") 은 ...

    트럼프 세법 개정 이후의 유산세와 증여세
  • 바삭바삭한 음식, 트랜스 지방 있나?

    [건강칼럼] 고소함으로 음식맛 내지만 건강엔 악영향   ▲ 연방식품의약국(FDA)이 소개한 트랜스지방 다량 함유 식품들. 피자, 팝콘, 마가린, 초콜렛칩 쿠키, 케이크, 파이 크러스트, 아침 식사용 비스켓빵, 케이크 크림 등이 포함됐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최정희 ...

    바삭바삭한 음식, 트랜스 지방 있나?
  • 진실됨

    제목부터가 영 컬럼의 성격과 맞지 않는듯 합니다.    ‘진실됨’이라니… 마치 자신과 타인의 양심을 고양하기 위해 하루하루 정직하게 살자고 말하는 도덕적 교훈 같기도 하고 살아 생전에 착한일 많이해서 내세를 준비하라 권하는 어느 종교의 슬로건 같기도 합니다. 하...

    진실됨
  • 러시아 신무기로 사면초가에 빠진 미국

    [시류청론] 러 구식미사일, 미군 미사일 절반 이상 요격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지난 3월 1일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개한 차세대 신무기들 때문에 ‘세계유일패권국가’ 미국의 자존심이 크게 상처 받은 날이다. 푸틴이 이날 공개한 차세대 신무기들...

    러시아 신무기로 사면초가에 빠진 미국
  • 좁쌀 한 알

    [종교칼럼] 장일순 선생의 삶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원주에는 협동조합이 많이 있습니다. 협동조합이 다른 협동조합이 탄생하는 것을 도울 정도로 원주는 협동조합이 상대적으로 많은 도시입니다. 그 한 복판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있습니...

    좁쌀 한 알
  • 로마제국의 황제와 한국의 대통령

    로마제국의 황제들 잔혹사를 떠올리며  청와대 주인들의 잔혹사와 대비해본다.  일제의 잔존으로 내려온 청와대 터를 옮겨……      지구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고대 로마는 BC 753년에 건국되었고 유럽의 대부분과 아프리카 북단, 잉글랜드, 소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히...

    로마제국의 황제와 한국의 대통령
  • 히네모아와 투타네카이 2편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 ‘연가’라는 노래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가’가 뉴질랜드의 구전민요라는 것, 더 나아가 그 민요 안의 옛이야기까지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옛이야기 ‘히네모아(Hinemoa)와 투타...

    히네모아와 투타네카이 2편
  • Art is

      뉴욕 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메트로폴리스 박물관은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약 330만 점에 이르는 소장품은 미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거의 대부분의 소장품은 개인 수집가들이 기증한 것이고 일부는 미술관에서 직접 구입한 것이다.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

    Art is
  • 투명인간

    초등학교 때였나. 그때 한동안 투명인간에 열광했다. 많은 사람이 만화책이나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 봤을 그 투명인간 말이다. 기억 속의 투명인간은 거의 슈퍼 히로에 가깝다. 조국을 위해 악당들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자다.     내가 그려왔던 투명인간은 드라마 속...

    투명인간
  • 세상은 시끄러워야 합니다 file

    사순절 이야기- 스물세 번째 편지     잠언 14:4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지만, 황소의 힘을 빌려야 소출이 많아진다.>   아이들은 스쿨 버스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지저분하게 흘립니다.   스쿨 버스 안에서 뿐 만이 아니라 아이들은 어디서든 늘 가만있지 못하...

    세상은 시끄러워야 합니다
  • 화려한 아방궁 ‘봉하마을‘ file

    시민들의 애틋한 마음이 모인곳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일요일 새벽 뉴스를 확인하니 여전히 남해안 뱃길이 막혔다는 보도다. 남은 일정상 더 이상 섬 여행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부산 서부터미널 부근에서 숙박한 나는 남은 닷새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

    화려한 아방궁 ‘봉하마을‘
  • 지구를 돕는 악투리안 file

    별나라형제들이야기(33)     Newsroh=박종택 칼럼니스트     악투리안의 교육내용과 과정은 어떠한가?   다음으로 저자가 집중적으로 질문했던 부분은 교육이었다. 지구인과 악투리안의 교육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구인은 타인과 경쟁을 하지만 그들은 경쟁이 없...

    지구를 돕는 악투리안
  • 내 인생 5년 후

    ‘내 인생 5년 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집중에 집중을 더해 딱 5년만 투자해라..라는 주제의 책은 5년을 투자해 인류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몇몇 사례들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의 의도는 사실 상당히 단순합니다. 5년 동안 한가지 목표를 향해 꾸...

    내 인생 5년 후
  • 국민이 행복한 나라가 이민자도 행복하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2012년부터 매년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한다. 지난달 발표된 ‘2018 세계행복보고서’는 특히 세계가 직면한 난민과 이민 문제를 반영, 이민자들의 행복지수를 처음으로 산출해 순위를 매겼다. 그 결과 이민자...

    국민이 행복한 나라가 이민자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