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공과 멸콩

 

신년 벽두부터 신세계 그룹 정용진 부회장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뜬금없이 올린 ‘멸공’(滅共)이라는 해시태그가 한국 정치권에 느닷없는 파문을 던졌다. 제1야당 대통령 후보와 야권 정치인들은 ‘멸치와 콩’으로 화답하면서 ‘멸콩’ 릴레이가 벌어졌고, 여당은 이를 두고 ‘색깔론’,’일베놀이’라고 비판했다.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에 재벌 기업인의 ‘멸공’ 때문에 난데없는 이념 전쟁이 벌어진 셈이다. 급기야 이마트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신세계 관련 주가가 급락하는 등 파장 끝에 정 부회장이 공식 사과까지 했다.

‘멸공’이라는 말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대결을 근간으로 한 냉전시대의 유물이다. 당시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지극히 당연한 구호요 가치였다. 북한, 중국, 소련 등 공산국 연합에 의해 민족 상잔의 비극을 겪고 그들의 안보 위협에 대처하며 경제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이다. ‘멸공’ 구호 안에는 끔찍한 과거를 되풀이 않겠다는 다짐과 현재의 번영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민족적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때에는 ‘멸공’에 동의하지 않으면 엄청난 사회적 탄압을 감수해야 했다.

이제 세상은 변했다. 대한민국은 공산권에 의해 생존권을 위협 받던 약소국에서 세계 10강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북한도 남북화해를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대화 상대가 됐고, 중국은 최대 교역국으로 급부상했다. 공산주의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국가의 번영을 위해 이들의 실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심으로 ‘멸공’을 정책적으로 추구한다면 이들과 적대해야 하고 이는 국가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정 부회장의 ‘멸공’과 이어진 야당의 ‘멸콩’ 릴레이는 다분히 구시대적인 행태가 분명하다.

‘멸공’이 국가 구호였던 시절에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극도로 억제됐다. 민주국가라면 ‘멸공’과 ‘반공’을 국시로 하더라도 개인은 이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고 반대할 자유를 보장받아야 마땅하다. 불온하고 위험한 생각이라도 그것 자체로는 사회적 해악이 될 수 없다.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어떤 생각에 대해서도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는 이러한 자유를 부정하고 개인의 머릿속까지 통제하려는 괴물이다. 이미 변한 세상에서 ‘멸공’은 낡은 유물이지만, 다른 생각 자체를 용납지 않는 전체주의의 잔재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정용진의 ‘멸공’ 논란에서 그는 한 개인으로서 ‘공산주의 박멸’을 뜻하는 ‘멸공’을 자신의 신념으로 소유하고 이를 표현할 자유를 가진다. 만약 이를 구현하기 위해 타인을 불법적으로 선동하고 폭력적 수단을 이용한다면 이를 제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멸공’이라는 해시태그를 단 행위를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설사 ‘멸공’이 신념이라도 경제번영을 통해 공산주의가 스스로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방법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한데 ‘멸공’이라는 생각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고 이를 ‘색깔론’으로 비판하는 것은 남북대결 시대에 ‘대화와 공존’을 무조건 ‘용공’으로 단죄했던 전체주의의 망령이다.

정치적 차원에서도 ‘멸공’이 결코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절대악은 아니다. ‘멸공’의 태풍이 휘몰아치던 70년대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를 통해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치적 이념은 이념일 뿐 그것이 반드시 실제 정책과 일치할 필요는 없다. 이념은 변치 않는 흑백논리인 반면 정책은 항상 변화하는 현실을 탄력적으로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이념을 두고 싸우면 결국 논쟁의 공회전만 일으킬 따름이다. 국내에서 ‘멸공’을 두고 아무리 사생결단의 논쟁을 벌여도 실제로 변할 건 전혀 없다. 어차피 대한민국은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싸울 때는 싸우고 협력할 때는 협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재벌 기업인이 복고풍 ‘멸공’을 애정하는 모습은 흔치 않는 일이다. 이를 ‘멸콩’으로 증폭시키는 정치인들도 흥미로운 군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현상을 대한민국만의 독특한 ‘B급 정치 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또한 넉넉한 민주주의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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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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