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적 민주주의

 

최근 한국 대법원이 정경심 교수의 각종 혐의에 대해 실형 확정 판결을 내리자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조국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조국 사태를 두고 ‘검찰 권력에 의한 멸문지화’라는 표현은 이 전 대표뿐 아니라 여러 여권 인사들과 심지어 조 전 장관 본인도 곧잘 써온 말이다. 검찰 수사가 시작된 후 조국의 형편은 그야말로 패가망신이다. 아내는 중형이 확정됐고 본인 재판은 진행 중이고 딸의 의사 취업은 봉쇄됐고 의대 학력마저 위태롭다. 아직도 조국 일가가 죄가 없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멸문지화’ 아니라 더한 말이라도 부족할 상황이다.

조국 집안을 두고 TV에나 나오는 사극 언어인 ‘멸문지화’를 진보 진영 인사들이 애용하는 것은 이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전 대표는 ‘조국 멸문지화’를 언급하며 야당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비슷한 화를 당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선거에 지면 없는 죄도 만들어 감옥에 갈 것이라는 여당 후보의 호소와도 궤를 같이 한다. 주요 양당 후보 중 누구든 지면 감옥행 대선이라는 냉소적인 비아냥이 이들에게는 절박한 우려인 셈이다.

선거는 승자가 권력을 독식하고 패자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사회에서 선거패배와 권력상실이 곧장 ‘멸문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극 드라마에서는 권력투쟁에서 패하면 역적으로 몰려 ‘삼족(三族)을 멸(滅)’하는 멸문지화를 당하곤 하지만,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전혀 현실성이 없다. 조국 일가 역시 전방위적 곤경을 당하고 있어도 ‘멸문지화’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극 드라마를 보며 현실 정치와 상통하는 재미를 느끼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의 본질과 이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극시대와 민주사회 사이에는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과 이를 행사하는 절차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있다. 사극은 정치를 힘이 세거나 모략이 뛰어난 인물이 권력을 잡고 그 후에는 자기 뜻대로 이를 행사하는 식으로 묘사한다. 권력이 권력자 개인의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 만사를 일거에 해결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반면 민주사회에서는 권력 획득은 물론 이를 행사하는 모든 과정이 법치주의에 의해 엄격히 규제된다. 권력의 획득과 행사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자체가 중대 범죄가 되어 처벌 대상이 된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인데 이를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려고 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리 비슷한 본질의 권력이라도 민주사회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자가 된 후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극적 방식은 사기성이 농후하다. 자칫 불법선거와 권력남용이라는 파멸로 질주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치에서는 ‘멸문지화’니 ‘폐족’(廢族)이니 하면서 권력의 획득과 행사를 둘러싸고 온통 사극적 세계관이 난무한다.

선거에서의 패배가 ‘멸문지화’로 이어진다면, 일가의 생사(生死)가 왔다갔다 하는 판에 도덕, 윤리, 진실, 정직, 일관성 같은 덕목이 힘을 쓸 여지는 없다. 사극적 세계관은 ‘성공하면 충신,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단순 논리를 추종하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에 관한 비리 증거와 의혹이 넘쳐나지만 누구 하나 시원스럽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지 않는다. 차라리 침묵할 것이지 삿된 논리와 딴청을 구사하는 얄미운 혀놀림은 ‘발암(發癌)’ 수준을 넘나든다. 어차피 패배하면 ‘멸문지화’니까 선거에 불리하면 무조건 뭉개는 게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 되어 버리는 사악한 현실이다.

선거 승리를 대반전의 복수혈전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사극적 세계관의 일종이다. 야당 대통령 후보 부인은 “내가 권력을 잡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한(恨)과 포부가 버무려진 독설(毒舌)을 서슴지 않았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영부인도 권력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하겠다는 발상은 법치와 거리가 먼 왕조적 발상이다. 민주사회에서 권력은 법과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방향타 역할로 제한해야 비로소 관련자들의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다. 권력자가 이 틀에서 벗어나 직접 권력을 사용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이를 덮으려고 하는 순간 ‘적폐’(敵弊)와 청산(淸算)의 악순환을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든 선거에서 승리한 후 왕좌에 올라 국청(鞠廳)을 열고 상대 진영을 역당(逆黨)으로 몰아 멸문지화를 선사하는 유치한 사극적 판타지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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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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