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노래하는 기독교인에게] 참고 성서 : 롬 7장 21~25, 6장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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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를 노래하는 기독교인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들어가는 말

청빙 후보로 방문한 그 목사님의 설교는 탁월했습니다. 바로 직전에 청빙후보로 방문한 목회자와 비교하면 ‘삼박자’가 잘 갖추어진 설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균형잡한 설교는 본문을 풀어내는 ‘논리력’ 외에도 ‘에토스’와 ‘파토스’가 필요하다고들 합니다.

전하는 말씀에 ‘도덕적 삶(에토스)’과 ‘진정성’ 또는 감성(파토스)이 묻어있는 설교를 명설교라고들 말하는데, 그는 바로 그런 목회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의 설교는 어휘 구사력, 군더더기 없는 논리, 균형잡힌 성경본문 해석 등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가 떠난 후 청빙투표를 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150명이 넘은 투표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의 반대표가 나온 것입니다.

청빙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이는 숫자는 늘기만 했습니다.가톨릭 신자들까지 몰려들었고, 복음에 관한한 ‘듣보잡’이던 사람들까지 회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교회당은 자리가 모자라 긴 의자들 사이에 보조의자를 놓아야 했습니다.

어느날부터는 북미유학생수련회(코스타)에도 초청강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의 강의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꽉 들어차며 최고 인기를 끌었습니다.

잘 나가던 유명병원의 끗발좋은 내과과장이었고, 같은 병원의 암전문 의사였던 부인과 함께 홀연히 부와 명예를 버리고 목회자의 길로 나선 그의 ‘소명의식’에 많은 사람들이 무한한 신뢰를 보냈습니다. 학위를 끝낸 몇몇은 그분의 권유를 따라 목회자의 길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는 종종 자신을 가리켜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복음주의자”라고 했고, 이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기독교 온라인 신문 톱뉴스에 등장했습니다. ‘성추행’ 또는 ‘성폭행’ 혐의로 오르게 된 것입니다. 수일동안 그의 성추문 뉴스가 가장 많이 본 기사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개인적 인연도 길고 깊었고, 직업상 그의 추문을 추적하지 않을 수 없어서, 직간접으로 알아본 결과는 ‘충격’이라는 단어로만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죄악을 범하면 우선적으로 개체로서의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만 집중하기 쉽습니다. 물론 죄를 범하면 범한 그 사람에게 우선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스럽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무릇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렘17:9)이라고 했고, “지킬 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키라”(잠언4:23) 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딱히 그의 충격을 넘어선 일탈행위가 그만의 잘 못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악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을 성의 도구로 생각하는, 성적 소비 대상으로 생각하는 왜곡된 성문화, 갑질문화-위계문화도 있을 것이고, 정당한 치리가 사라져버린 교회문화 등도 분명 한몫을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악을 이루는 상황, 그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을 곰곰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죄 앞에 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크리스천이 누린다는 ‘변화’와 ‘자유’란 무엇인지를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곤고한 사람’ 바울

오늘 나눌 로마서 7장 본문은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은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사도 바울의 절규에 가까운 고백이 문제가 됩니다. 과연 이 고백이 ‘바울의 전 생애에서 어느 시점에 나온 것이냐’는 것이 논란의 핵심입니다. 이 고백이 바울의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현재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냐는 것입니다.

세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본문이 현재형이므로 그 누군가의 현재의 경험인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의 고백이 아니고,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 또는 초신자의 경험을 바울이 대신하여 말한 것이다. 일종의 ‘영적 감정이입’라는 것입니다. 이미 경지에 이른 대 사도의 고백치고는 좀 유치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바울 자신의 체험적 고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해석은, 바울의 바리새인 시절의 경험, 즉 과거의 경험을 말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본문이 현재형 동사로 되어 있는 것은 생생하고 극적인 체험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 용서받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중생한 신자들, 특히 바울과 같은 대 사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해석은, 이 본문이 중생한 바울의 ‘현재적 체험’이 분명하다는 입장입니다. 율법과 계명의 관계를 논한 7절부터 13절의 과거형이 14절부터는 현재형으로 바뀌었고, 귀절들에 표현되어 있는 죄성의 고민 등은 불신자들이나 율법주의자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깊은 영적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카알 바르트도 이 같은 해석을 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해석이 무난하다고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마지막 해석을 택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회심하기 전이나 후나 영과 육의 싸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 자연인에게 주어진 양심, 즉 거부할 수 없는 양심, 변명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막연하나마 인간 본연의 ‘죄성’과 싸우게 된다는 것을 성경말씀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4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송사하여 혹은 변명하여…”라고 했습니다. ‘자연인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 즉 양심이 있어서 죄성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죄악과 싸우고 있습니다. 자연인이 천부적으로 주어진 양심에 따라 사는 것보다 더욱 강력한, 비교할 수 없는 무기인 하나님의 전신갑주,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을 갖고 싸웁니다.

그런데 자연인이 되었든, 기독교인이 되었든 정도와 빈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죄성 앞에서 의외로 허망하게 무너진다는데 우리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고 결국에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절망적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회심한 바울은 인간의 죄앞에서 탄식하고 슬피우신 예수님의 심정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죄악의 권세앞에 무력한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습니다. 허황한 인간의 의가 기본이 된 ‘율법의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이를 토대로 패권주의적 유대왕국의 상징인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소리내어 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온 인류의 죄악을 내려다 보시며 통곡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다니던 열두 제자들의 배신, 특히 베드로의 배신에 대해서도 바울은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방금까지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던 군중들이 돌변하여 “예수를 처단하라”고 외치던 군중들의 이율배반도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이란 것이 얼마나 간교한 존재인지, 휩쓸림에 취약한 존재인지 몸소 체험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전한 순수복음을 금방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오랜 유대종교문화전통에, 주변 유대인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여 ‘거짓 복음’에 환호하는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저주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과 자신에게 일어났던 배반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하여 팍스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힘을 통한 평화)를 앞세운 로마의 세상에서, 권세자들과 자본가들과 유대 종교인들이 뒤엉켜서 복마전을 만들어온 부패하고 뒤시끄런 유대사회를 환멸가운데 지켜봤을 것입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죽임의 문화’가 횡행하던 시절을 한때는 율법주의의 눈으로, 다메섹 회심 이후로는 복음주의자의 눈으로 절절하게 경험했을 것입니다.

자신 또한 마가 요한의 일로 복음의 은사와 다름없던 바나바와 심히 다투어 갈라서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요 당대 석학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암암리에 엘리트적 자존심이 강한, 한성깔 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 복음의 깊고 광대함을 깨달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죄악이 턱앞에까지 차서 헐떡거리는 전존재를 체험적 영성으로 통찰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절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고백은 절망의 심연에서 나오는, 가슴을 찢는 부르짓음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부르짖었을까요.

개인이 구원 받아야 사회가 구원 받는다?

보통 죄, 또는 죄악의 문제를 생각할 때 그것이 원죄이던 인간의 악한 심성으로 범하는 자범죄이던 인간 개인의 죄악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문제를 논할 때에도 ‘개인 구원’ 또는 ‘개인 영혼의 구원’에 집중합니다.

바울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우리 인간이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지는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의 고백 속에서, 직접적인 말씀들에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야를 전쟁터로 보내고 그의 아내를 취한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질책을 받고 음식을 전폐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침상이 눈물로 적셔지기까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슬퍼했습니다.‘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우리 개개인들도 저마다 죄에 대한 고백이 있을 것입니다. 원어적 의미로 ‘과녁에서 벗어난’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과녁, ‘하나님의 표준’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죄란 말이고, 다른 표현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죄에 대한 자기 체험적 고백을 통해 ‘구원’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개인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소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개인의 죄성과 개인구원만을 강조하는 분들이 흔히 말하는 논리가 있습니다. 개인이 변화하면 사회도 변화한다. 일종의 일직선적 논리(linear logic)인데요, 이런 논리에 따라 개인전도에 목숨을 겁니다.

개인전도에만 목숨을 거는 분들은 개인 하나하나가 착하면 그들이 모인 집단은 그리고 사회는 자동적으로 착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사회란 개개인의 합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회학자들은 '사회 명목론'(social nominalism)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오래전 버려진 이론입니다.

대체 변화를 말할 때 어느 선까지 변화해야 진정한 변화란 말인가. 한번 변화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가? 미완성인 변화, 부분적인 변화를 정말 변화라고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논리학적 고민도 나옵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한 이론이 실험실 밖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의외로 변화받은 존재로서의 모습, 자유인이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제는 잘 믿는 거 같았는데, 오늘은 잘 믿지 않는 것 같은 베드로의 모습이 나옵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인들끼리는 잘 믿는 거 같았는데, 교회 밖에서는 그렇지 않은 엉뚱한 모습이 나옵니다. 변화에 관한 한 아직 미완성의 상태인 개인이 거대한 사회를 정말 변화시킬 수 있는가?

개인이 구원 받으면 사회도 구원받는다는 ‘사회 명목론적’ 구원론은 사회 자체의 속성에 대한 이해의 오류 내지는 한계 때문에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이론입니다.

가령, 열 사람이 모여 하나의 사회가 된다고 할 때, 그 사회는 열 사람의 합계보다 더 큰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때 크다고 하는 그 '어떤 것'이 곧 사회 자체의 속성인데, 개인구원론은 ‘그 어떤 것’의 정체에 대한 규명을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자리인 사회는 주판알 같은 개개인들의 산술적 합으로만 구성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개인들간의 관계, 더 나아가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간의 관계 속에서 얽히고 설켜서 뿜어내는 사회적 에너지의 결정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체들은 그 스스로의 역동성에 의해 사회적 에너지를 방출해 내는데 이때 악의 영향력들, 가라지들도 함께 방출해 냅니다.

사회적 무관심, 그 ‘능동적 죄악’

종종 우리는 이러한 가라지, 악의 영향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 내 자유를 누린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무관심의 세계에 빠져듭니다. 정말 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악의 영향력들로부터 우리를 방어하고 자유케 할까요?

제가 아는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아예 신문도 보지 않고 텔레비전도 끊어버린 분들이 있습니다. 뭐 마음도 불편하고 머릿속도 뒤시끄럽고 해서 ‘영성’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입니다. 물론 일정기간 그게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많고 뒤시끄런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채 살아간다고 해서 개인 영성이 깊어지고 성화가 빨리 이뤄지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라지로 가득찬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굳이 세상에 오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굳이 우리 가운데 왜 오셨을까를 반문하고 싶습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무관심할 때 아기는 울음으로 반응하거나 일을 저질러 버립니다. 엄마의 무관심에 아기가 앙탈로 반응하는 이유는, 엄마가 아기에게 '무관심의 에너지'를 발산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사회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말은 '무관심의 사회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무관심의 사회적 에너지를 받는 사람들 역시 가슴 속에 앙탈의 에너지를 축적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관심의 사회적 에너지를 쏘아대면 쏘아댈수록 이러한 악순환은 되풀이 됩니다. 우리의 딜레마는, 무관심으로 악해진 세상이 더욱 압도적인 힘으로 부메랑 반응을 일으킨다는데 있습니다. 나에게, 나의 가족에게, 내가 속한 공동체에 보복의 가라지를 뿌려댄다는 것입니다.

우리 근.현대사에 나타난 1910년의 경술국치, 6.25한국전쟁, 제주 4•3 사태, 4•19 혁명, 5•16 군사 쿠테타, 12•12 군사반란, 5•18 광주, 4.16 세월호 등 끝없이 암호처럼 이어지는 사건들은 우리가 열심히 쏘아댄 무관심의 사회적 에너지가 집적되어 어느 순간에 거대한 핵반응을 일으키면서 표출된 사례들에 다름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사회에 대한,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기는커녕, 우리를 죄악의 구렁으로 몰아넣습니다. 무관심으로 인한 우리의 죄악은 불의한 사회 체제와 구조를 지탱시키고 더 큰 암덩어리로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모두가 속해있는 체제와 구조속의 또 다른 개인들로 범죄케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필경, 사회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더이상 '제로' 상태를 의미하지 않으며 자기 기만적 '능동적' 죄악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의미있는 일을 하도록 1달란트를 받고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당당하게 다시 1달란트를 가져온 종을 성경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고, 밖에 내쳐져 슬피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중생했다고 하는 우리는, 자유인이라는 우리는, 아무일도 하지 않고 마음조차도 아까워서 이웃에게 주지않는 ‘무관심의 죄악’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래서 아예 회개할 기회도 갖지 못한채, 너무 일찍 축배를 들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무지, 그 숨겨진 죄악

그런데 이웃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무관심만이 기독교인의 딜레마가 아닙니다. 무관심이 무서운 것은, 무지의 죄악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무관심으로부터 나오는 ‘무지’는 우리를 무너뜨리는 사탄이 가져다주는 가라지입니다. 종종 우리는 기도할 때 ‘알고도 지은 죄 모르고도 지은 죄’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모르고 짓고 있는 죄’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며,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는 삶의 고유한 자리인 세상 속에는 '알지 못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잘 알지 못함으로 해서 그것들이 뿜어내는 악의 영향력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흡수하며 살아 간다는데 있습니다.

리차드 니버는 ‘기독교와 문화(Christ & Culture)’라는 책에서 다섯가지 형태로 ‘문화’라는 이름의 이 알지 못하는 것들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설명합니다. 문서선교사로 알려진 박양식 목사는 이 같은 문화를 ‘죽임의 문화’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한가지 가까이 있는 쉬운 예를 들어봅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을 아주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 속에 무한대의 동물적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는 사실과, 인격의 상실과, 인격적인 관계의 상실을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인류발전의 원동력으로 역이용하여 부의 확장에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극심한 부의 불균형을 초래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진화론적 적자생존의 틀속에 너죽고 나살자 는 정글의 법칙을 근간으로 지탱되는 체제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최대 약점은 건강하고 영리하고 능력있는, 소위 가진자들은 유감없이 탐욕과 이기심을 발휘하여 무한대의 부를 축적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 즉 노약자, 병자, 지체 부자유자, 저능자, 심약자 등 소외그룹을 챙길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풍요로움 속에 들어와 있는 탐욕이나 인간소외를 감지하지 못하고 크게 고민하지 않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그것들이 죄악을 엮어내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딜레마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그 무엇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발산하는 악의 영향력들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가 크리스천들에게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엮어져 있는지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하여, 시대에 대하여,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에 무지한 예들을 한번 들어볼까요? 히틀러 치하에서의 순박한 민중들, 나치즘을 지지하는 논문들을 발표한 학자들, 국가교회 지도자들이 '아닙니다’라고 소리치지 못한 예를 보시기 바랍니다. 고백교회 본회퍼 목사님의 외로운 목소리를 제외하고 절대 다수의 국가교회 성직자들이 히틀러의 극악한 폭력을 지지했습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악이 얼마나 평범한 얼굴을 하고 우리를 찾아오는지를 갈파해 냈습니다. 악은 흉악하고 강력한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적 얼굴을 갖고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를 지지하고 충실하게 복무한 군인들과 과학자들의 대다수는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이차대전이 끝난 후 나치 부역자들의 삶을 추적한 아렌트는 이들이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데 놀랐습니다.

노엄 촘스키와 더불어 ‘시대의 스승’으로 불리는 하워드 진 박사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진 박사는 1960년대는 인권운동에 매진했고, 1970년대부터는 몸을 던져 반전 평화운동을 한 미국의 유명 사학자입니다. 1960년대 인권운동사를 그린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 인디언 학살과 인권침해로 전철된 <미국민중사>, 이라크전 등 부당한 전쟁에 항의한 <불복종의 이유> 등의 저작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2차대전에 파일러트로 참전한 이 분이 어느날 수만 피트의 상공에서 충실하게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어느 지역 적지를 향해 포탄을 투하하는 일이었습니다. 늘 하던 것처럼 그날도 포탄 투하 버튼을 눌러 댔습니다. 옆의 동료와 농담을 주고 받으며... 그런데, 우연히 나중에 지상에 내려와 자신이 포탄을 터뜨린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적지에만 떨어진 줄 알았던 포탄은 엉뚱하게 민가들이 밀집한 지역에 떨어졌고, 그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후로 그는 반전평화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가 조사하고 공부하면서 알게된 사실은 전쟁이 일어나면 90%가 민간인이 죽고 그 가운데 90%는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악은 때로 쉽고 평이하고 무난하게 합리적 얼굴을 나타납니다. 기독교인이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갖지 못하면 아주 쉽고 평이하게 능동적으로 악에 동참하게 됩니다. 최근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이나, 이명박 시절 대선개입을 하여 줄줄이 엮어들어간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변명아닌 변명이 있습니다. “나는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심을 다했을 뿐이다” 놀라운 것은 이들 가운데 핵심을 이루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것입니다.

우리는 달란트를 받은대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동료들과의 관계도 나이스 해야 하고 전문성도 키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복무하고 있는지 잠시 멈춰서서 고민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종교성이 강한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들’에 익숙하게 절하며 살아온 것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삶으로는 아덴 사람들 처럼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 절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 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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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로 인하여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절하며 사는 기독교인은 얼마나 많은가.
 

구조악에 갖힌 기독교인

우리가 이웃과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이치를 알게되면 전에 누리지 못한 자유를 제법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라는데 우리의 마지막 딜레마가 있습니다.

제가 맨앞에서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의 구조는 개인들의 사회적 에너지의 산술적 총합 이상의 어떤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집단 에너지'라 부릅니다. 이 집단 에너지는 종종 집단에 속한 개인의 판단능력을 블랙아웃 시켜버립니다.

설령 올바른 판단을 한다 할지라도, 개인이 그 에너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양심대로 행위하는 것은 좀체로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종종 우리 인간은 얽히고 설킨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의 판단에 의한 양심적 선택 속에서 살기보다는 어떤 거대한 구조악적 집단 에너지의 흐름에 휩쓸려 산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행동이 뻔히 악인줄 알면서도 어떤 흐름에 뭍혀서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오래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서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고 무겁게 한 젊은이 가 있었습니다.

사태의 와중에서도 그는 제법 양심적인 군인으로 데모군중을 향한 잔학행위를 거부하여 상관으로부터 심한 욕설과 구타를 당하기도 합니다. 사태가 악화되어 발포 명령이 내려진 속에서도 그는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옆 동료가 교전 중 총탄에 맞아 죽게 되자 결국 '폭도들'을 향해 악에 바친 듯 총질을 해대고야 맙니다.

젊은이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제법 괜찮은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이 총질을 해댄 것이 순전히 자신만의 판단과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요?

분명 방아쇠를 당긴 주체는 그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총을 쏘아대는 '적군'도 있었고, 명령을 내린 상관도 있었으며, 옆에서 죽어간 동료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에 앞서 '광주'를 가능케 하고 주인공이 속한 군부대를 출동케 한 정치 사회적 구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젊은이로 인해서 마음이 천근처럼 무겁고 안타까웠던 이유는, 바로 개인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양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일찌기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저작에서 도덕적인 개인이 비도덕적 사회에서 어떻게 타락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지를 설파해 내고 있습니다.

개인의 양심적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구조악적 집단 에너지의 흐름, 여기에 우리 삶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사회 속에 들어와 있는 죄'가 결국 개인을 죄의 사슬로 결박하고 마는 우리 삶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른체 해야 할까요. 숨어버릴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시도록 양보할까요? 그 어느 것도 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인간의 죄성에 민감한 기독교인은 이 부분에 이르러 절망합니다. 죄성과 관련한 개체 인간으로서의 자유의 한계도 알고, 무관심으로 인한 죄악도 알고, 무지로 인한 죄악의 매커니즘도 알지만, 어쩔수 없이 올라타버린 타이타닉호, 비도적덕 사회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숙명에 몸을 떨며 절규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의 고백이고 우리의 고백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바울의 성찰이고 우리의 성찰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가는 말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관련하여 부자유한 존재인지, 부자유한 존재로 살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기회나 기억조차도 없이 너무 일찍 축배를 들어 오지는 않았는지 피차 성찰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노래하고 저 높이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전에, 이 땅에서 무너져 내린 우리 자신을 먼저 철저하게 되돌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처절한 자기성찰이 필요하다고 해서 심한 죄책감에 함몰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로마교인들에게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으로 고백이 멈춘다면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겠습니까. 그렇게도 가슴 쥐어뜯는 절규를 하던 바울이 군더더기 없이 즉각적으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급반전 고백을 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르겟습니다.

죄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엮어지는 지를 알게되면 우리는 더욱 영적으로 민감해져서 회개하게 되고, 번뜩이는 자유의식에 눈뜨게 되며,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깊이와 넓이를 느끼며 살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웃과 사회와 역사에 대해 책임있는 존재로 살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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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평통 달라스 협의회 유석찬 회장(왼쪽)과 오원성 위원장(필자. 오른쪽)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 기원과 북한의 올림픽 참여를 환영하며 오원성_제18기 민주평통 달라스협의회 부회장     “평창!” 2011년 7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의 감격스런 한 마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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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창올림픽, 남북통일 앞당길 절호의 기회

    [시류청론] ‘한반도 운전자론’ 실현… 비핵화 요구는 판 깨는 소리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1월 9일 고위급 회담 개최 등 남북 간 해빙 무드가 조성된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드디어 1월 6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평창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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